2009년 11월 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피조물들의 탄식소리!
말 씀 : 로마서 8장 18-25절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11월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또한 올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마무리를 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을 처음으로 밟은 암스트롱이 지구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라고 시편 8편 1절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당시가 1968년이었는데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지구를 찍어 보내온 사진이 너무나 아름다운 청록색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40년이 지난 지금은 지구가 온난화로 인하여 회색빛을 띈 죽은 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으로 산성비가 오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온난화는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음으로 인하여 메탄가스를 배출하여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오늘 22절 말씀처럼 지구의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피조물들의 탄식소리들 중에 영혼들의 탄식소리에 관심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혼들의 탄식소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 성도님들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1.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의 고난을 통하여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모두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고난을 당하며 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호를 해주셔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많이 받는 질문중의 하나가 하나님에게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기도 하며 다치기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보호를 해주는 것이 당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에 선교하려 가신 목사님이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 활동 하는데 차량이 빗길에 미끄러져 왜 죽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 좀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암에 걸리고 5년이 지나서 다 낳았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다른 곳에서 또 다시 암이 생기느냐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지금의 기독교 신앙이 왜곡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현세의 축복만을 강조하는 기복적인 종교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물질의 많고 적음이 축복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가 황금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고난으로 탄식하는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18절 말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현재에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8절 말씀을 시작하면서 생각 좀 해라고 합니다. 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은 축복을 주면서 왜 나에게만 고난을 주느냐고 원망하며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 당하는 고난과 장차의 영광을 비교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지금당하는 고난이 미래의 축복임을 알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하였다면 그 종교 개혁을 확장시키고 완성시킨 사람은 칼뱅이었습니다. 칼뱅이 죽을 때 본문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면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이 정말 크다면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남
피조물들이 고난 속에서 탄식을 하면서 “주님! 억울해요!” 라고 하소연을 하면 주님이 무엇이라고 답변하실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죄를 말 한마디 없이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다.” 라고 대답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려움 속에서 탄식을 하여도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위로가 밀려옵니다. 결국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19절 말씀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대한다는 의미는 집중한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고대하며 집중을 하면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세상에 집착을 하면은 20절 말씀처럼 허무한데 굴복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22절에서 피조물들이 탄식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매년 세계 도처에서 많은 지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동남아에서 대형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모아서 인도네시아 지진현장에 사랑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964년에도 알라스카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가나 117명이나 죽고 7억 5천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난 어느 지역은 유달리도 사람들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몇몇 사회학자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진현장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면담하고 “어떤 사람이 지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았는가?”를 발표했습니다. 크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첫째 지진을 한번 이상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지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지진을 잘 이겼습니다. 둘째 가족들이 함께 변을 당한 경우 생존율이 높았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한 사람들의 생존율이 높았습니다. 이들은 극단적인 순간에도 끝까지 예수님께 집중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엄청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지진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탄식소리가 아니라 예수님께 집중하여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탄식소리로 흩어지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탄식소리가 더 크게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집착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에 집중을 할 때 고난을 해결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
인간에게 소망은 산소처럼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소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기다리다 지쳐서 피조물들이 신음 속에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24절 말씀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진정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진정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또한 소망은 참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5절 말씀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합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함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질 소망의 행복이 달아나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소 바깥일에 쫓겨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했던 게 아쉬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 외식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인 것입니다. 기쁜 마음에 서두르게 됩니다. 먼저 나가서 차의 운전석에 앉아 기다립니다. 엄마가 치장을 하기 위해 10분 정도 지체합니다. 앞으로 서너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니 그 정도 늦게 출발한다고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그런 판단 기능이 상실됐습니다. 오히려 설렘과 흥분이 분노 표출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당신은 왜 맨 날 늦어, 시간도 안 지킬 바에야 다 그만둬! 다 들어가!” 그 이후로 외식은 고사하고 자녀들 앞에서 부모가 격렬하게 싸웁니다. 싸우고 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의 입에서 후회스러운 탄식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바로 제가 늘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함으로 가정의 즐거운 행복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참고 기다릴 때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려가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응시한다고 합니다. 혹시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려서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했을까봐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를 성찰하며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기다림 속에서 진정한 소망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찌보면 고난의 연속입니다. 현재의 고난에 탄식하기보다는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세상의 집착하여 탄식하는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에게로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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