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실패와 성공 사이
말 씀 : 고린도 전서 2장 1-5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우리나라의 전통 설날 명절입니다. 예전에 정부에서 지금의 음력 설날을 양력 설날로 옮겨보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지금의 음력 설날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국민들 가슴속에 새겨진 전통의 정서가 무서운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력 설날이라는 전통은 고수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전통 윤리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대 심방을 하면서 성도님들을 통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여명의 남녀 중학생들이 졸업식 날 한 여중생에게 집단으로 성추행을 행사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심방 이후에 직접 확인을 해보니 인터넷 동영상에 남녀 중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단체로 괴롭히는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낮 주택가에서 또래 여학생의 옷을 강제로 벗긴 뒤 찢거나 머리에 케첩을 뿌렸습니다. 피해 여학생이 거의 나체가 되는 등 폭력적인 장면이 이어지는데도 남녀 학생들은 박수를 치는 등 환호성까지 질렀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가해학생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과 졸업식 날 어린 학생들의 단순한 소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립되면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면서 IT 강국임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로 인하여 다음 세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지금 정치권에서 강도론을 가지고 이전투구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에 교육을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음력으로 맞이한 설날에 올 한해를 실패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영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아덴에서의 선교 실패
오늘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말씀 속에서는 먼저 일어났던 사건이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아덴으로 갔습니다(행17장). 당시에 아덴은 철학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철학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반에 복음을 곁들어서 증거를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에는 무언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덴에서 가장 좋았던 반응은 “어디 다음에서 와서 무슨 말을 하나 한 번 더 들어보자!” 라는 냉소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 방법에 대하여 많은 회의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저도 조금은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 제일 힘든 일이 말씀을 있는 힘을 다해서 선포하고 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을 때입니다. 성도들이 졸고, 주보를 쳐다보고, 옆 사람과 속사이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전송하고 있는 등 산만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하면서 평가를 하려는 태도들입니다. 목회자가 사역을 하면서 지치는 경우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나 비난을 들을 때가 아니라 말씀이 성도들에게 먹이지 않고 전혀 반응이 없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한 바울 심정도 조금은 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잘 믿으면 실패도 하지 않고, 병도 없고, 가정 문제도 없고, 모든 기도가 응답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위대한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가장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패도 하였고, 병도 들었고, 기도 응답도 받지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진실한 기도에 다 응답하시지만 단지 응답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때로는 ‘예’로, 때로는 ‘아니요’로, 때로는 ‘기다려라’로, 때로는 다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응답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응답의 형태까지 결정하려는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 선교의 실패 속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메세시가 있는 것입니다.
2. 고린도 교회에서 선교 성공
아덴에서 선교에 실패했던 사도 바울은 자리를 옮겨서 고린도에서 다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덴에서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를 깨닫고 다시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면은 그가 고린도 선교를 왜 성공하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적인 말의 지혜와 아름다운 것으로 전파하다가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지역에서는 철학적인 아름다운 말로 전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선교에서 성공하였다는 더 확실한 증거로서 2절 말씀을 보면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한 이후에 고린도 지역에서는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티기독교시민연합에서 “기독교를 박멸하자” 라는 모토로 인터넷에서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 서울 시내버스 4개 노선의 일부 버스 외벽에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을 그의 초상화와 함께 부착하여 광고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비판 받고 견제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 비판의 차원을 넘어 조롱 경멸하는 내용을 광고로까지 내보내며 공격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는 일이 아닐 뿐더러 특정 종교에 대한 악의적 도전입니다. 반기련의 문제점은 그의 발언 중 필요한 부분만 발췌,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은 매우 복잡합니다. 정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철저한 종교 부정론자도 아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오가며 고뇌한 인물입니다. 이번 버스 광고에 사용된 대로 신을 부정하는 듯한 말도 했지만 종교를 긍정하는 용어를 사용한 적도 많았습니다. 논문에 나타난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더 알게 됐다”는 표현이나 죽기 1년 전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으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과 다름없다”고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유리한 부분만 가져다가 악의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티기독교시민연합에서 가장 불만을 갖는 것은 기독교의 독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말라!” 겉으로 보면 굉장히 포용력이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실제로는 큰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독실’과 ‘독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해입니다. 독실과 독선은 엄연히 다릅니다. 독선은 없어야 하지만 독실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배우자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것이 독선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독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깊은 관계로 들어가면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독실’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아덴처럼 헬라의 중심 도시인 고린도에도 그의 주장이 통할까 두려웠습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보면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 합니다. 아덴에서 철학적 논리와 함께 전하여도 실패를 하였는데 고난과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전하면 과연 통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더 두렵고 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자 결과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결국 초대교회 중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고린도 지역에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3. 성공과 실패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새해에 실패하지 아니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실패와 고린도에서의 성공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전하는 사람도 동일합니다. 헬라 철학을 숭배하는 환경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십자가만을 의지했느냐? 의지하지 않았느냐? 가 실패와 성공의 경계선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가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 실패와 성공을 결정 지울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까? 4절과 5절에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은 자기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지할 때는 자신의 지혜가 죽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힘들게 하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내세우면 자기를 죽이면서 모든 것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아덴에서는 자기를 내세웠기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내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성공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다 새해에는 사도 바울처럼 오직 십자가만을 내세움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성공할 수 있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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