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비난을 당할지라도...
말 씀 : 사도행전 26장 24-32절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지금 우리나라는 캐나다 동계 올림픽에서 젊은 선수들의 금메달로 인한 열기가 대단합니다. 저는 그 열기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중고등학교 시절 ‘메이드 인 재팬’은 무조건 믿고 사는 세계 최고의 제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생각나는 사건 중의 하나는 코끼리표 전기밥솥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의 고위층 주부들이 일본에서 코끼리표 전기밥솥 하나씩 꿰차고 들어온 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국형 전기밥솥을 만들라”고 불호령을 내렸고 청와대는 ‘밥통 만들기 작전’까지 진두지휘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 당시 주부들이 코끼리표 전기밥솥하나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학생들은 소니 워크맨 하나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옹성처럼 보이던 메이드 인 재팬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소니제품이 소비부진으로 인해 고급 백화점들의 폐점 행렬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객수송 세계 1위에 빛났던 일본항공(JAL)은 법정관리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세계 자동차업계 1위를 달리던 도요타가 대량 리콜 사태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도요타가 제품에 대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지불하고 슈퍼볼의 광고시간을 샀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역풍을 맞아서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리콜을 위해 찾아온 고객들의 피해를 보상하는 비용으로 지불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여론입니다. 비난에 직면하여 신뢰를 잃었을 때 억울하고 속상해서 조급하게 회복하고자 할수록 더 힘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감당하다 보면은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오늘 말씀에도 비난에 직면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비난에 대하여 어떻게 극복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세상 사람들의 비방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이 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극렬 유대인들에게 체포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로 압송되기 이전에 유대왕 아그립바와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서 변증한 후에 있었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변증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회개와 부활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합니다(24절). 바울이 열심히 변증을 하였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미쳤다고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체포당한 이후에 변증을 잘하여서 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적인 상항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쳤다는 비난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은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증에 대하여 참되고 온전하다는 확신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비난에 흔들리는 문제는 영적인 깊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참으로 공허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금방 칭찬하고, 들지 않으면 금방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더라도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지지 않고, 나를 비난하더라도 그 말에 반응해서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에 휘둘리는 이유는 남들이 나에 대해 평가해 주는 것들이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평가가 좋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남들의 평가가 나쁘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남들이 평가하는 것으로 자신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고 할 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거듭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둔감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떤 환경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죄인이 되어서 왕과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인이고 재판관인지 분간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이 죄인임에도 불국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26절 말씀을 보면은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환경이나 처지에 매이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환경이나 자신의 처지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환경이나 처지보다도 복음에 대한 확신이 더 클 때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환경과 처지를 극복하고 담대하게 증거한 복음은 세가지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로마 총독 베스도의 반응입니다. 바울을 미쳤다고 비난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과 오해가 많은 사람입니다. 편견과 오해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교회에서 조금만 열심히 하여도 광신자 취급을 하며, 나약한 자들이 모여드는 곳이 교회라고 비방합니다. 방송매체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만 나와도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처럼 싸잡아서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유대 왕인 아그립바의 반응입니다. 관심은 가지고 있으나 체면 때문인지 주저주저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은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반응은 버니게의 반응입니다. 오늘 30절 말씀에 등장을 하고 있으며 아그립바 왕의 누이입니다. 이 여자는 여러번 결혼을 하였지만 실패를 하였습니다. 동생에게 얹혀서 왕비인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에 대하여 비난도 관심도 없는 무관심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미쳤다고 하고, 아그립바 왕은 주저하며 뒤로 미루었고, 버니게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했던 바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을 보면은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고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태도를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면은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옥이나 떨어져라”, “저러다 하나님에게 한방 얹어 터지지” 등 저주의 행동과 말들을 삼가야 합니다. 거절당하여도 마음 상하지 아니하고 마무리를 잘하여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3. 복음에 대하여 거룩한 자존감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너무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내용은 제가 마흔 일곱 살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깨어나서도 생생하게 기억이 되어서 너무나 찝찝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나이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심란해졌습니다. 제가 길어야 3년 밖에 못산다는 것 아닙니까! 잠에서 깨어난 자리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평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이 고백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 앞에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집안에서 기도를 마무리하고 교회로 새벽기도를 나오려하는데 오늘 29절 말씀인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목요일 저녁 늦게까지 묵상을 하면서 설교를 준비하였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주석이나 다른 설교 집을 참조하였을 때 지금은 사도 바울처럼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를 말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이지만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가슴에 감동이 되지 않아서 그대로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하여 기도하는 말미에 이 말씀을 바로 앞 구절과 연관하여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우리가 연약해서 미래에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여도 지금 적용 가능한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구절이 “결박된 것 외에는” 그리고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라고 연결이 됩니다. 자신이 결박된 현실은 얼마나 비참한 신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결박된 현실보다 훨씬 더 존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결박된 문제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이 예수님을 믿는 나를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들보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처럼 되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자존감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결박된 현실에 짓눌려 있으면 ‘나와 같이 믿는 자가 되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인처럼 결박되었지만 영혼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나와 같이 믿는 자가 되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가 나를 결박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을 더 위대한 가치로 여기는 거룩한 자존감이 있을 때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감이 있을 때 비난 속에서도 휘둘리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세울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존감이 있을 때 환경을 초월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감이 있을 때 세상의 어떤 문제에도 결박되지 아니하고 ‘나처럼 믿는 사람이 되어라’고 말 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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