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8일 주일설교
설교 제목 : 주의 손이 함께하는 인생
말 씀 : 사도행전 11장 19-26절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0. 들어가는 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의 줄거리를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러시아에 사는 유대인들의 고통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테비에란 남자인데 그 아내가 너무 살기 힘드니까 테비에에게 갖가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테비에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아내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또 다시 남편과 결혼해서 25년 동안 다섯 명의 딸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비에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그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이 장면에서 저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살면서 수고와 고통으로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본질은 사랑이 식어진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살면서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수고와 고통은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만 간직하고 있다면 불행을 얼마든지 행복으로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데 사랑이 식어졌기에 모든 것이 힘들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모든 수고와 고통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기에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후에 일어난 큰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이들은 좌절하고 낙심하여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져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향하여 식지 않는 사랑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주의 손이 어떤 경우에 함께 하는가?
오늘 말씀의 배경은 세계 선교의 전초 기지였던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를 개척한 사람들을 알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이렇게 위대한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20절 말씀을 보면은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세계 선교의 위대한 역할을 하였던 안디옥 교회가 출발을 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교회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의 본을 따라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운 교회로 기억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주의 손이 함께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특별히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손이 함께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21절).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의 손이 함께하여 많은 영혼들을 추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누구였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파하였는데(19절), 안디옥에서 전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에 해당하는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20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전도 대상자 모두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나 사도들이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쉽게 벗어 버리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처럼 환상을 본 것도 아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편견이나, 자신의 틀이나, 자신의 방법에 매여 있을 때는 주의 손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모든 편견이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였을 때 주의 손이 함께하여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는가?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전해집니다. 참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는 소문만 듣고 있는 교회라는 점입니다. 여하튼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서 이르렀다고 매우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22절), 그 거리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약 480km나 되는 거리입니다. 바나바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지체하지 아니하고 단숨에 달려가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합니다(23절). 그리고 24절 후반부에서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바나바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무리를 추수하는 부흥의 역사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나바가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권면으로만 교회가 저절로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바나바의 성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4절 전반부를 보면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나바의 두가지 측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바나바의 인간적인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바나바의 영적인 성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인간적인 착한 성품위에 영적인 성품으로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지다보니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하면 우리는 좀 모자라서 맨 날 당하는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착한사람은 ‘사람을 향해 선한 목적과 동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흑심을 품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동시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더 뜨거워지는 것만이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저는 지금의 교회들이 영적인 성품 때문에 비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성품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인간적인 성품이 받쳐주지 못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나타납니다. 인간적인 성품과 영적인 성품이 균형이 잡힐 때 안디옥 교회처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립니다.
3. 교회가 성장한 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핍박을 받아서 흩어진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 성품을 통하여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보통은 지금까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한 일을 대단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더 중요한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사울을 찾으려 그의 고향인 다소로 갑니다(25절). 그리고 사울을 만나서 안디옥 교회로 데려와 동역자로 세워서가 일년 동안 함께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26절). 사람을 찾아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바나바에게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당시에 바울이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바울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지나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경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과거의 사울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변화된 이후의 미래의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역자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바나바처럼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변화된 이후에 미래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선견지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서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양적인 성장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가르침으로 인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질적인 성장을 시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일 년 동안 가르친 열매를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합니다(26).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의 성품이 180도 다른데 어떻게 일년동안 함께 사역을 할 수 있었느냐?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모두다 자신의 것들을 포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이미 드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과거의 모든 경력이나 위치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처음에는 비웃는 이름이었다고 역사가들이 전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들’ 이라는 비웃음으로 불렀던 이름이었습니다.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불신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당시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저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 이란 분명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불신자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느냐? 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안디옥 교인들처럼 ‘저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숫자만 늘어나는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신교회도 안디옥 교회를 꿈꾸어봅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인간적인 성품과 영적인 성품이 균형을 이루어가며, 큰 무리가 더하는 양적인 성장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가는 질적인 성장을 동시에 이루어가면서, 주의 손이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서 구제와 선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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