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참된 길동무
말 씀 : 누가복음 24장 13-35절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0. 들어가는 글
예수님이 부활하신 두 번째 주일입니다. 최근에 우리 주변에 자살 소식들이 빈번하게 들려옵니다. 얼마 전에 탤런트 최진영씨가 자살했습니다. 그의 누나 최진실씨가 자살한지 1년 여 만에 동생이 또 자살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남매가 어릴적 고생하며 자라고, 서로우애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더니 누나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찾아와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울증이 참으로 두렵게 다가옵니다. 우리 인생이 혼자가기에는 너무 힘든 여정입니다. 혼자 가다 보면은 자기 연민이나 착각에 빠지기도 쉽고 현실성도 약해집니다. 이래서 우울증 환자가 우리 사회에 많은 것입니다.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단절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길을 갈수 있는 동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참 좋은 길동무 하나 있습니까? 한 길 간다고 다 길동무가 아니라 마음이 같아야 길동무라 할 수 있고 깊은 대화가 가능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너무나 힘든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입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까지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길동무가 되어주신 예수님
오늘 말씀에서 두 제자가 낙심하고 절망하여 풀죽은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그들의 심정은 잘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17절). 그들은 예수를 만나면서 희망을 품었습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면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더 큰 혼란만 가져다주었을 뿐입니다(22-23절).
두 제자는 낙담하여 절망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길이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심도 컸겠지만 길을 걸아가면서 동무가 되어 대화 나눌 때 많은 위로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로에게 위로는 되었지만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은 슬며시 찾아오셔서 함께 길을 가면서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은혜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길동무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지치고 힘든 인생길을 걸어갈 때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진정한 길동무가 되어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대화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실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화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대화 속에는 반드시 회복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모습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모습을 보면서 이런 궁금증을 가져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는가?”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였다면 당시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잡아 심문하고 사형선고를 내린 대제사장, 헤롯 왕, 빌라도 총독,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서 “결국 내가 옳았다”라든지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처럼 정당성을 내세우는 투의 말이나 몸짓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의 부활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구원의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 하나 생기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유령이 아닌가 생각하고 놀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첫 눈에 알아볼 수 없었다는 말은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가 전에 보던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분의 외형은 전에 알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닌 새로운 예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친밀하고 친숙한 동작을 했을 때 알아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다든지,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실 때 그제서야 그들은 곁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두 제자는 빵을 떼어 주시는 친숙한 모습 속에 눈이 밝아져 알아보고 있습니다(30,31절). 부활자체의 기적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부활의 은혜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풀어야 궁금증은 두 제자가 “어떻게 부활의 확신을 가지는가?”입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길동무가 되어서 아주 자상하게 슬픈 사연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동정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수영하지 못하는 사람이 건져준다고 달려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면은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었던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것이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32절의 말씀을 보면은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합니다. 두 제자가 부활의 확신을 체험하는 것이 외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이 주님을 보고 밖에서 들어온 것이 강조되었다면 지금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강조함으로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듣고 내적으로 부활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즉시 사라진 이유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풀어야 궁금증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까지 함께 길을 가면서 깊은 친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길동무를 하면서 친밀해진 손님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를 만루하며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28,29절).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들어가십니다(29절).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는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이 손님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즉시 그분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30,31절). “왜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자마자 그 즉시 사라졌느냐?” 는 것입니다.
수십번 묵상하는 말씀이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기는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작년 깨달음 다르고 오래 깨달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 대해서 여러번 설교를 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길동무가 되어서 함께 하신다는 새로운 접근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부활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면서 더 감동 적인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제시한 궁금증이 가장 풀기 어려운 궁금증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자 즉시 살아진 이유는 그들에게 더 이상 보고 있는 주님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밖에 두지 아니하고 이미 마음속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밖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길에서 함께 하셨던 주님이 이제는 자신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영원히 함께 하심을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알았을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깨달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33절).
사람이 길동무가 되었을 때는 조금은 서로가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삶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길동무가 되어서 함께하였을 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져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동일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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