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말씀및찬양 >
  • 주일예배
가라지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마태복음 13장 24-30절/ 5월 9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5-10 추천 0 댓글 0 조회 434

2010년 5월 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가라지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말 씀 : 마태복음 13장 24-30절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0. 들어가는 글

오월의 가정의 달입니다. 지난주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정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190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집은 없어도 가정은 있었습니다. 가정을 싸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집은 있어도 가정이 없습니다. 유대인 가정에 군대에 간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식탁에 아들 숟가락, 젓가락을 놓습니다. 그리고 밥도 퍼놓고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집은 버려도 가정은 버리지 않습니다.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어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이냐고 묻는다면 가정 같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정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루디아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고넬료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가정들이 교회를 이룬 초대교회가 지금도 가장 좋은 교회의 모델로 남아있습니다. 현대의 교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대형화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로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가라지입니다. 내 안에도 가라지가 있을 수 있고, 우리 교회에도 가라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가라지를 해결해야만 우리 가정과 교회가 더욱더 주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고 하는 의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본적인 주식은 빵이었습니다. 밀은 반드시 재배해야 하는 기본 곡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라지’는 잡초가 아니라 독보리라고 합니다. 이 식물은 생장 초기의 생김새가 밀과 매우 흡사해서 이삭이 나오기 전까지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보통 봄에 잡초를 제거하는데, 그때는 밀과 흡사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삭이 나오면 비로소 가라지라는 걸 알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는 밀도 함께 뽑히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수확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가 키가 큰 밀을 먼저 수확하고, 가라지는 나중에 따로 잘라내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의 이런 밀농사 풍경을 그대로 비유로 차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중요한 주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시대에 때가 이르기도 전에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으려 했던 두 부류는 정치적으로는 열심당원들이요,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식민지로부터 하루빨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분명하였습니다. 선은 독립운동을 하는 유대 열심당원들이었고 악은 유대민족을 억압하는 로마 군대와 이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율법적으로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도 일도 양단식으로 너무 쉽게 구별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이었기에 교제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성미가 급한 이들에게 인내와 관용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선과 악, 진리와 불의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어서 외양만 보고 쉽게 구별할 수 없듯이 이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알곡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자신들의 정치 군사적인 독립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모조리 뽑아 내야할 가라지라고 보았던 열심당원들에게 제동을 거십니다. 창기나 세리는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심판했던 바리새인들의 성급한 교만들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전교조 교사 명단 공개 문제로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전교조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교조를 가라지처럼 뽑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똑똑한 젊은 교사 등 6만여명이 타도의 대상 된다면 얼마나 큰 국가적인 손실이겠습니까! 참 교육을 실천하겠다는 취지로 출범한 전교조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렵다는 교원 임용고시를 뚫고 교직에 입문한 똑똑한 젊은 교사들이 가장 많이 가입해 있는 곳이 전교조입니다. 전교조가 교육계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도록 견제하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는 어리석음을 가장 많이 범하고 있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모든 상황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가 이제는 교회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진리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처단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가두고, 화형에 처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일어난 마녀사냥 광풍으로 약 4만 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가라지를 뽑는다고 하면서 밀을 뽑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최근에 이어령 박사님이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이 심판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한국 교회를 향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를 가려내는 일에 열심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불거지면 대뜸 ‘당신 혹시 가라지 아니야?’ 하면서 마녀 사냥식으로 뽑아내려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지금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라지를 뽑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인내와 관용의 의미를 한번쯤 되새겼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 가라지와의 공존

가라지는 분명히 악한 원수 사단이 뿌린 씨앗입니다. 사람들이 잠을 잘 때에 몰래 뿌린 씨앗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잘 때’를 ‘영적으로 잠잘 때’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사단은 항상 잠자는 틈을 이용해 악한 씨를 뿌리니 악한 씨를 뿌리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깨어있으라고 설교합니다. 참 은혜롭지만 예수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중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눈에 띄게 활동하는 게 아니고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 있다 해도 사단이 악한 씨를 뿌리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가 없다는 사태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이 비유에서 주인의 태도가 매우 담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기색도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벌어진 양 호들갑을 떨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담담하게 가라지가 곡식밭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했습니다. 곡식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는 사실을 부정해야 할 현상이나, 뽑아 없애야 할 현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공존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가라지들이나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가라지들이 사라져야 할 대상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는 공존해야 할 대상들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알곡이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29절 말씀을 보면은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고 합니다. 우리가 알곡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잘못 식별하여 우리의 식별에 있어서의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그분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심판은 주인이 주인의 때에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추수꾼이 아닙니다. 종에 불과합니다. 불완전한 우리들이 완전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처음 시작도 유사합니다. 과정도 어느 정도 유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달라집니다. 열매로 판가름이 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여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알곡이라는 열매를 맺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요 은혜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라지도 알곡이 될 수가 있는 가능성의 기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의인이 됩니다. 아직은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 있는 은혜의 대입니다. 가라지의 중생이 가능합니다.


여성 산악인 오은선씨가 8천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최근에 성공하였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전하여 이루었던 그 가치에 대해서 존경을 보내고 싶지 조금도 폄하하고 심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여성 최초의 등반이라고 우리나라 매스컴에서 떠드는 일은 진정한 산악인의 정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등반이 육체적 스포츠 같지만 실제 추구하는 건 내면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느냐는 자기와 산의 관계이지 남과 경쟁할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손가락 장애가 있다면 등반하는 데 어려운 거지, 경쟁자가 나보다 더 유리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은선 대상이 여성 최초라고 하면서 남과 경쟁에서 이긴 것처럼 상업주의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의 숫자와 높이에만 집착하는 성과주의, 1년 안에 몇 개 봉을 올라 달라는 집요한 스폰서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정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산을 만나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합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경쟁에서 이김으로 정상에 서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내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라지라고 판단하여 뽑는 일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내는 공존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밀과 가라지가 혼재하여 구분하시 힘든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의 곳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알곡을 맺는 일에 마음을 다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누가복음 23장 27-28절/ 5월 1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5.17 0 578
다음글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가자/ 로마서 12장 1-5절/ 5월 2일 창립 기념주일 설교 조영식 2010.05.04 0 368

415809 경기 김포시 승가로 87-51 TEL : 031-985-4941 지도보기

Copyright © 김포한신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1
  • Total231,587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