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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보는 사랑/ 룻기 3장 6-14절/ 8월 8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8-08 추천 0 댓글 0 조회 638

2010년 8월 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손해 보는 사랑

설교 말씀 : 룻기 3장 6-14절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0. 들어가는 글

지난달 베트남 신부의 애처로운 사연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일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스무 살의 탓티황옥의 마음에는 온통 희망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코리언드림에 부풀어 있던 스무 살 신부의 목숨을 앗아간 당사자는 27살 연상의 신랑이었습니다.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신랑이 환청상태에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딸의 주검을 부여잡고 피울음을 쏟아내는 부모의 모습에서 멀지 않은 과거 속 우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동경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땅의 많은 누이들이 국제결혼을 빈곤 해결의 묘책 삼아 이국 땅을 향해 날아갔던, 베트남 신부와 비슷한 과거지사가 우리에게 있는 게 사실입니다. 탓티황옥의 변고가, 그 부모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무 살의 신부가 남긴 유품인 수첩에는 “오빠 사랑해”라는 한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도 사랑을 꿈꾸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가난하다고 사랑이 없겠는가. 가난한 나라의 처녀라고 해서 사랑을 꿈꾸지 않고 결혼을 결심했겠는가. 한국인과 결혼하려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사람과 결혼하려는 남편감들은 “안 이에우 엠(당신을 사랑해)”라는 베트남어를 쓰고 외우며 준비해야 마땅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일찍이 인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 그 가치가 판단되고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피부색깔이나 출신성분, 사용하는 언어 등이 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건 차별이 있어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됐건 여자가 됐건 노인이 됐건 장애인이건 외국인이건 예외없이 존중받는 인격체로 예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방인 여인이 킹덤드림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에 와서 결혼을 하는 과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사랑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룻과 보아스의 사랑은 서로를 존중해주는 사랑입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엘리멜렉은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 말론은 모압 여인 오르바를 둘째 아들 기룐 역시 모압 여인 룻을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나오미의 아들도 모압에 거주한지 십년쯤에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처럼 과부가 된 젊은 며느리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방여인은 룻은 밭에서 이삭을 주어가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 것 봉양했습니다. 룻이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을 하면서 밭의 주인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압 소녀가 성실히 일하면서 시어미니를 봉양하는 모습에 보아스는 감동을 받고 그녀에게 많은 베려를 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중에 한 사람임을 이야기해줍니다. 이스라엘 법에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여 기업을 무르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무를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는 더 이상 아들은 없었지만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밭에서 룻에게 자비를 베푼 보아스였습니다.


그리고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보아스에 찾아가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9절). 보아스는 룻에 대한 답변으로 11절 말씀에서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참으로 감동적인 사실은 이방 여인이며 혼자된 여인에 대하여 보아스가 “현숙한 여자”라고 존중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존중 속에서는 지금까지 밭에서 베풀었던 배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전에 배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밖에 모르던 위차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자신밖에 모르다 보니 가정에서도 위기를 맞이하고 직장에서도 위기를 맞이합니다. 위기를 맞이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가정에서 아내와도 소통이 되고, 직장에서 같은 팀원들과도 소통이 되면서 타인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성숙한 사랑 일방적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랑은 보아스가 룻을 향했던 마음처럼 상대를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고 존중해주며 배려해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2. 룻과 보아스의 사랑은 절차를 무시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기업을 무르는 일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등장합니다. 보아스가 12절에서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정직하게 룻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아니하고 절차를 밟아서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게 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사랑하면서도 절차를 무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차를 해결 한 이후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랑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보내온 메일의 내용입니다. <한국의 한 유명한 한의과대학의 교수진들과 대학원생들로 구성된 의료봉사팀이 인근 지역에 왔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사정을 전혀 무시한 그분들의 준비 부족과 그들을 초청한 곳의 준비 부족으로 이곳 정부에서 의료 진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반응이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마음을 다지게 했습니다. “수많은 못사는 나라를 다녔지만,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다. 기분 나빠서 못하겠다.”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 온 훌륭한 의술을 가진 분들이지만, 섬김의 진정한 마음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텐데...> 선교사님의 메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상대방을 아래로 보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절차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자신들의 우월의식이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절차를 밟아줌으로 연약했던 상대방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세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절차를 밟는 수고 속에 상대방을 향한 깊은 섬김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절차를 조금은 귀찮아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목사님들이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 나아가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법을 잘 지켜야 하는 데 무시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 높은 사람들은 열외로 놓더라도 저를 비롯한 목사님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특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보아스처럼 절차를 밟는 수고로움을 통하여 연약한 룻을 세워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3.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손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만약에 더 가까운 사람이 기업을 무른다고 하면은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차를 밟아 나아가는 룻과 보아스는 하나님이 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주리라는 전적인 신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다면 절차를 추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시키고자 합니다.


보아스는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차를 밟는 일에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기업무를 자에게 찾아가서 증인들을 세워놓고 당신이 처음이요 당신이 무르지 아니하면 그 다음은 자신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4:4). 보아스는 룻을 얻기 위하여 인간적인 술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정직입니다. 하나님이 보아스의 정직한 중심을 보고 도와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에 대한 대답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고 합니다(4:6). 기업을 무를 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라는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심정을 보아스에게 대비를 하면은 보아스를 손해 볼 각오까지 하면서 룻에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손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애해득실을 따지고 계산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계산을 초월한 조건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손해를 따지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죽음 직전에 옥합을 깨뜨립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손해를 넘어선 사랑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 계산하면서 허비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이 손해를 넘어선 고귀한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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