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인인가?/ 마가복음 12장 1-12절/ 2012년 1월 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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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가 주인인가?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2장 1-12절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0. 들어가는 글
2012년 임진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총체적 난국 속에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북한의 절대 권력자가 죽어 북한의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중학생이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정치의 좌, 우파 대립이 이제는 노동, 교육, 법조계 등 사회 각 분야에 번져서 국론이 분열되어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분야에 대해 기도를 하지만 그중에서도 총체적인 난국 속에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속에 심한 답답함을 느끼며 기도의 방향을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끙끙대며 할 수 있는 기도는 우리 민족 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상황에 속지 말고,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탄식이나 동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들이 새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포도원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일꾼들을 능욕하고 결국에는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합니다. 이런 악한 농부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입니다(9절).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핵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 핵심 메시지를 찾지 위하여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야 합니다. 악한 농부들이 “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였는가?” 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모든 소유가 자신들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7절). 이것이 악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포도원에서 종으로 일하지 않고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은 누구인가?” 에 핵심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 메시지인 “주인이 누구이냐?” 에서 죄에 대한 중요한 정의가 나옵니다. 죄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란 내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죄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보다도 그 안에 담긴 저의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뱀이 분명히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 내용을 알고 먹었다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종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건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동산에서도 가장 무서운 죄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는 모두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비유는 주인의 말을 어겼더니 심판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자신이 종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뛰는 것을 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죄입니다. “나는 개성이 강해, 고집이 세, 신념이 확고해”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다 죄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아가 깨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섬기는 주님의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 됨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2. 모퉁이의 머릿돌을 버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던지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0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건축양식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건물의 모양을 결정하며, 건물의 든든한 기초가 되어 건물이 세워지는데 중심축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없이는 건물을 세우는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영적인 건축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집을 건축 하는데 다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건축을 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계획도 세우고 목표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 세운 우리들의 계획과 목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우리들의 어떤 계획이나 목표보다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그들의 눈앞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가나안이라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계획과 목표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건축에서 아무리 집을 잘 짓고자 하는 계획과 목표가 있을지라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세우고자하는 모든 일의 계획과 목표에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임재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주인 됨을 어떻게 인정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동일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예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 합니다(요4:24). 그러면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상반되게 나왔습니다. 아벨은 제물은 열납하였지만 가인은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느냐?” 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논쟁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을 나름대로 해보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허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제물을 바꾸어서 가인이 양을 바치고 아벨이 곡식을 바쳐더라도 결과는 동일하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 4절에서 5절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고 합니다. 제물 앞에 그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벨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여기에 대하여 “믿음이 있느냐?” 와 “믿음이 없느냐” 로 보고 있습니다. 아벨처럼 제물뿐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것은 가장 진실 된 믿음의 행위요, 가인처럼 자신을 드리지 못하면서 바치는 제물은 진정한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면서 아무리 좋은 제물을 바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제물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제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칠 때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진실 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부디 임진년 새해에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으로 삼고, 새해의 모든 계획과 목표에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임재하고, 우리 자신을 온맘 다해 주님께 드림으로 풍성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제목 : 누가 주인인가?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2장 1-12절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0. 들어가는 글
2012년 임진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총체적 난국 속에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북한의 절대 권력자가 죽어 북한의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중학생이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정치의 좌, 우파 대립이 이제는 노동, 교육, 법조계 등 사회 각 분야에 번져서 국론이 분열되어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분야에 대해 기도를 하지만 그중에서도 총체적인 난국 속에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속에 심한 답답함을 느끼며 기도의 방향을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끙끙대며 할 수 있는 기도는 우리 민족 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상황에 속지 말고,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탄식이나 동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들이 새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포도원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일꾼들을 능욕하고 결국에는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합니다. 이런 악한 농부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입니다(9절).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핵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 핵심 메시지를 찾지 위하여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야 합니다. 악한 농부들이 “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였는가?” 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모든 소유가 자신들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7절). 이것이 악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포도원에서 종으로 일하지 않고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은 누구인가?” 에 핵심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 메시지인 “주인이 누구이냐?” 에서 죄에 대한 중요한 정의가 나옵니다. 죄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란 내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죄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보다도 그 안에 담긴 저의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뱀이 분명히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 내용을 알고 먹었다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종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건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동산에서도 가장 무서운 죄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는 모두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비유는 주인의 말을 어겼더니 심판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자신이 종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뛰는 것을 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죄입니다. “나는 개성이 강해, 고집이 세, 신념이 확고해”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다 죄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아가 깨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섬기는 주님의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 됨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2. 모퉁이의 머릿돌을 버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던지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0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건축양식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건물의 모양을 결정하며, 건물의 든든한 기초가 되어 건물이 세워지는데 중심축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없이는 건물을 세우는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영적인 건축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집을 건축 하는데 다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건축을 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계획도 세우고 목표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 세운 우리들의 계획과 목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우리들의 어떤 계획이나 목표보다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그들의 눈앞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가나안이라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계획과 목표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건축에서 아무리 집을 잘 짓고자 하는 계획과 목표가 있을지라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세우고자하는 모든 일의 계획과 목표에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임재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주인 됨을 어떻게 인정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동일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예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 합니다(요4:24). 그러면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상반되게 나왔습니다. 아벨은 제물은 열납하였지만 가인은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느냐?” 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논쟁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을 나름대로 해보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허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제물을 바꾸어서 가인이 양을 바치고 아벨이 곡식을 바쳐더라도 결과는 동일하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 4절에서 5절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고 합니다. 제물 앞에 그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벨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여기에 대하여 “믿음이 있느냐?” 와 “믿음이 없느냐” 로 보고 있습니다. 아벨처럼 제물뿐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것은 가장 진실 된 믿음의 행위요, 가인처럼 자신을 드리지 못하면서 바치는 제물은 진정한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면서 아무리 좋은 제물을 바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제물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제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칠 때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진실 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부디 임진년 새해에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으로 삼고, 새해의 모든 계획과 목표에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임재하고, 우리 자신을 온맘 다해 주님께 드림으로 풍성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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