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메시야의 탄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요셉)
말 씀 : 마태복음 1장 18-25절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금주 헌법재판소에서 혼인빙자간음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법이 시행된 이후로 56년 만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성들을 보호하자는 법인데 여성계에서는 오히려 환영을 한다고 합니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의미 속에 남성보다 더 약자취급을 하고 있는 불평등 법이라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순결이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제는 법에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선택을 통하여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혼인 전에 간음한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정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잉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잉태한 아이는 정혼을 한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당시의 법으로는 간음한 여인으로 정죄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마리아가 처한 현실입니다. 금주부터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메시야 탄생을 준비한 사람들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로서 마리아의 정혼한 남편 요셉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에 대하여 증명할 길이 없는 마리아를 정혼한 남편 요셉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하여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요셉은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결혼을 약속한 마리아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정혼은 지금의 결혼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정혼한 이후에 신랑 측에서 일년 안에 신혼집을 장만하여 신부를 데려오는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줄을 모르기 전까지는 아마도 요셉이 느꼈던 배신감은 너무 커서 받아들이기가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에게 복수보다는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다른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에게 마지막까지 보여준 사랑의 배려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9절에서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여인이라고 소문을 내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당시의 법임에도 불구하고 소문내지 아니하고 조용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하였어도 그의 생명만큼은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리아의 수치를 덮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NIV 성경에서는 “disgrace”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disgrace”는 단어는 치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치욕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사랑의 배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배신감에 자신도 힘들었을 텐데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을 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이 되고 이웃 중심이 되어서 배려하는 크기와 깊이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시찰회가 있었습니다. 시찰회가 열리는 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하십니다. 10분 남짓하는 설교 시간인데 그 중간에 제가 얼마나 졸았는지 몸까지 흔들리면서 졸았다고 합니다. 시찰회 목사님이 모이면 10여명 정도님입니다. 그 안에서 몸까지 흔들며 졸았으니 얼마나 표가 났겠습니까! 점심식사 시간에 그 목사님 미안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먹었습니다. 이제는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이 더 힘들다는 알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10분 하여도 제가 몸까지 흔들면서 졸았는데 저는 30분정도 하지 않습니까! 그걸 듣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위대하십니다. 설교하는 내 입장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성도님 입장이 되어보니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2. 요셉은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배려가 깊은 요셉을 향하여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하여 현몽하였습니다(20절). 하나님은 현몽을 통하여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고지하였습니다. 요셉이 주의 사자를 통하여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줄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여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으로 몰아세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역사 속에서 가룟 유다보다도 더 경솔하고 나쁜 인간으로 평가받았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셉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마리아도 살리고 태중의 예수님도 살리는 놀라운 사건이 된 것입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를 통하여 현몽을 받은 이후에 지체 없이 잉태한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24절). 요셉이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은 메시야의 탄생을 준비하는 최고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잉태한 마리아를 지체 없이 데려오는 요셉의 순종 속에 어떤 마음이 담겨져 있을까요? 첫 번째 마음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주의 사자를 통하여 전하여준 현몽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머리로 그 현몽에 대하여 수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 없이 믿은 것입니다. 두 번째 마음은 요셉과 마리아의 신뢰가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현몽하나만가지고도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올 수 있을 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든든하게 쌓여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수십 년을 살아오다가도 한번 닥친 위기로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모래위에 쌓은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쌓아온 신뢰는 반석위에 세운 집처럼 든든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난 즉시 주의 사자 분부대로 순종하여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또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에 대하여 현몽을 받았을 때도 지체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살해할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머리로 따지고 계산하면 이미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순종은 단순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머릿속이 복잡하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힘이든 것입니다. 요셉처럼 주님만 바라보며 단순해진다면 순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쉽게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3. 요셉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잉태한 마리아를 데리고 온 이후에 취한 행동입니다. 오늘 말씀 25절을 보면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고 합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동침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침이 불가능하였다면 굳이 언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요셉을 보면서 참으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육신의 정욕을 절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부모들은 칭찬을 통하여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칭찬과 함께 반드시 절제를 가르쳐야 균형 잡힌 좋은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서 연극을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주인공이 되지 아니하면 원생들이 연극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보다도 부모가 주인공 시키려고 더 극성을 부리기도 합니다. 저도 교회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연말에 발표회를 하였습니다. 제가 성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큰 손자다보니 제 연극을 보려고 할아버지부터 삼촌에 고모까지 다 왔습니다. 그리고 성극이 끝났습니다. 우리보모는 제가 성극에 나온 것을 보았는데 할아버지와 삼촌과 그 밖에 사람은 제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연극에서 “행인 2”로 분장하고 대사 한마디도 없이 무대를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별무리가 없었고 온가족이 즐거웠습니다. 지금 같으면 난리 나죠. 우리 귀한 아들 ‘행인 2’ 가 무엇이냐고 선생님이 봉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공원을 가면은 애완견의 목에 줄을 달고 다니는 것은 필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개에게만 목에 줄을 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목에도 줄을 매놓고 앉아서 누워있든지 책을 본다는 것입니다. 마음 것 놀아라고 하는 이이들은 엄마 위치를 확인하면서 불안해서 제대로 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에 줄을 매어서 붙잡고 있는 아이는 훨씬 안정감있게 잘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아이의 손에 줄을 매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처럼 절제할 줄 아는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지키며 살릴 수 있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 중에 시작은 사랑으로 하지만 마지막 결론은 절제로 끝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려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과 절제하는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였던 요셉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성당 옆 공동묘지에 있는 십자가를 가져다가 바닷가에 세우면서 놀았습니다. 신부님과 성도들은 놀라서 죽은 사람을 모독하였다고 그 아이를 정죄한 이후에 마을에서 추방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요셉이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아마도 요셉은 그 아이와 함께 바닷가에서 십자가를 세우면서 함께 놀아 주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작스럽게 보모를 잃은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바닷가에서 십자가를 세우면서 치유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공동묘지를 훼손했다는 분노가 아니라 보모를 잃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요셉이 자기 중심이아니라 마리아 중심으로 배려해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생명과 태중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것 처럼요. 다시 한 번 요셉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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