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약해져야 하는 교회
말 씀 : 고린도 전서 1:25-31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0. 들어가는 글
제가 지난주 글을 읽으면서 저에게 충격을 준 글의 한 대목입니다. “교회 가서 설교 듣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설교 들으면 죄책감이 더 심해지거든요. 난 저렇게 못 살고 있는데 어떡하나,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정말 심하게 들어요. 그래서 예배 중에도 안절부절 못하고 식은땀이 나고요.”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죄책감을 많이 심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설교 속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제가 설교했던 테이프를 들어보면서 한 주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죄책감이 자리 잡게 되는 이유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늘 비난과 질책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마음의 병이 되어서 사람의 생기를 앗아가며, 생명력을 파괴시킵니다. 더 나아가 신앙마저 흔들게 되며, 자신의 구원마저 의심하게 합니다. 죄책감을 마음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 내면으로 깊이 껴안게 되는 것을 봅니다.
죄책감이 심하면 하나님의 용서, 인간의 용서를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된 잘못된 죄책감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나서까지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죄책감을 가슴에 부여잡지 말고 손을 펼치고 놓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속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능력 받아 강해지는 것만을 축복이라고 강조할 때 연약한 영혼들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오히려 약함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죄책감에서 회복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는 본래 세속적인 상업 도시였고, 스포츠와 오락의 도시였고, 우상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지역 특성이 교회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하는 교만이 있다 보니 서로 분쟁하는 것이 끓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속이 상해서 26절 말씀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만과 자랑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약해져야 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서 편지만큼 약함을 극도로 예찬한 성경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27절 말씀에서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합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약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들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인이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학력을 통하여, 직장을 통하여, 신분을 통하여 자신의 강함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교인들도 세상에서 좋은 학력과 돈 많은 직장과 높은 신분을 얻었을 때 주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력이나 직장이나 신분을 통하여 자신이 성공했다는 강함을 나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하나님에게 도움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하진 선교사님의 ‘반응’이라는 책을 보면은 세상에서 성공이라고 이루었던 모든 강함을 내려놓고 가장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공학박사라는 학력을 내려놓고, 대덕 연구단지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을 내려놓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수직이라는 높은 신분을 내려놓고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통하여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약해진 모습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강함의 역사가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배타성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저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약점중의 하나는 자기가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받아드리지 않는 배타성과 불화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처지를 강조하다보니 배타성과 불화가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한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것을 강조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으로 고린도 교회는 혼란과 불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7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처지에서 살게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처지에서 살게 하신다고 말씀하면서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7장 24절 말씀을 보면은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혜와 은사를 절대화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혜와 은사들을 무시하는 배타성과 불화를 지니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신의 교회만을 다녀야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교회의 존재가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도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개인이 받는 은혜나 은사만을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면은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한 성도들을 위축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처럼 겨우 주님을 붙잡고 있는 연약한 영혼의 믿음도 귀한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선택에 대해서도 가장 좋은 것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그러지 못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가는 것처럼 정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선택이나 경험도 자신의 것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것들을 절대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며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전병욱 목사님이 한 달에 백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12시간씩 독서를 하면서 학자적인 삶을 산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전목사님의 10%에 해당하는 만큼도 책을 구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방 때문에 12시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것인가 하면서 열등감이 밀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목사님의 경험과 선택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저는 그분처럼 책을 그만큼 구입하여 그렇게 많은 시간동한 독서를 못하지만 심방을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목회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것인지 우열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과 선택을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라고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를 인정해주는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이기성이 아니라 이타성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는 일에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성향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이기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일에 열심 내는 것을 하나님 믿는 일에 열심 내는 것처럼 둔갑해서 보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상업도시로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도 부유하였습니다. 자신의 무역이 잘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와 구제하는 일에는 참으로 인색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와 구제에 열심이었던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인색함에 대하여 책망을 하였습니다. 개인각자가 이기적일수도 있지만 고린도 교회처럼 교회라는 집단이 이기적이 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발로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믿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미국에 거주하는 자신의 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자신의 딸이 암과 실명직전의 시력 장애가 믿음으로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적 때문에 믿음을 가졌다면 기적 같은 일 때문에 배교해야 하는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세례 받은 지 정확히 3주 후에 자신의 딸의 장남이 25살을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문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수재의 돌연한 죽음 앞에서 아버지와 딸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딸은 물론이고 이어령 교수도 믿음을 지켰다고 합니다.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 자체였던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세례 받을 당시 그는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성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 파괴’라는 극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이어령 교수님이 고백하는 절망과 자기파괴는 자신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이타성으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심이라는 자기파괴가 끓임 없이 일어날 때 주님께 더 가까이 감으로 인하여 이타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함에서 약함으로, 배타성에서 다양성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변화되는 길은 각자의 일이 아니라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강한 사람은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약해지는 사람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습니다. 한신 교회 성도님은 어떤 물줄기의 신앙이 흐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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