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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 전서 1: 14-19 / 3월 2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3-22 추천 0 댓글 0 조회 308

2010년 3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말 씀 : 베드로 전서 1: 14-19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에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법정 스님에 대한 국민들의 추모열기가 기대이상으로 대단하였습니다. 법정 스님이 자신의 종교를 초월하여 국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에서는 ‘건물이나 숫자의 크기’보다 ‘영향력의 크기’가 훨씬 중요합니다. 왜 국민들이 법정 스님을 그렇게 추모합니까? <무소유>란 책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소유에는 두 가지의 무소유가 나옵니다. 물질에 대한 무소유와 마음에 대한 무소유입니다. 물질에 대한 무소유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마음에 대한 무소유 인 것입니다. 내가 건네었던 친절한 마음을 상대의 반응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무소유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조차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마음의 무소유인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삶을 기독교의 용어대로 말하면 ‘실천하는 믿음’을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말로 살지 아니하고 삶으로 실천하여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는 영적 원리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14절). 전에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사욕은 육신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충동을 채우고자 하는 삶은 타인의 생명을 파괴하며 자신의 생명까지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납치 살인 사건이 너무나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의 옛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쇳조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그 쇳조각이 돌아가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이때 느끼는 아픔이 죄책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맨 처음 나쁜 일을 할 때에는 그 죄책감이 상당히 크지만, 가면 갈수록 그 쇳조각의 날이 무뎌져서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인을 계속 저질러 온 범죄자가 조금씩 조금씩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되고 양심이 무디어져서 나중에는 전혀 가책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의 우화같은 이 이야기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지금 왜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했을까요? 믿음 하나 지키겠다고 흩어진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처음에 믿던 그 확신이 어디로 가고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의 자식처럼 잘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했던 과거의 행실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순종의 자식이었던 성도들이 과거의 육신적인 행실이 다시 나오고 있습니까? 지난 달 말 외화로는 처음으로 국내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한 영화 아바타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골자는 두 다리를 못쓰는 장애인인 남자주인공이 캡슐 속에 들어가 자신의 아바타에 연결시켜 정상인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거동이 불편한 장애자인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몸이 오가는 사이 정체성혼란도 찾아오게 마련인데, 이런 현상이 현실세계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인들의 삶도 ‘아바타’의 삶으로 ‘교회’와 ‘세상’을 오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오가다보니 혼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의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세상의 방법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육신적인 충동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코드에 맞추어라

지난해에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산 중의 하나가 코드 논쟁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뜻이 통하거나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면서 자신들의 출세를 위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은 씁쓸한 생각이 밀려옵니다. 사실 정치보다도 신앙생활에서 더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코드를 맞추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뜻이 통하거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보면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코드에 성도들이 맞추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부산 여중생 납치 사건의 주범인 김길태을 보면서 자녀 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 중 최고의 교육은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는 교육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과 거룩한 코드를 맞추는 본을 보일 때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코드를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의 자녀 교육은 하나님과 철저히 코드를 맞추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위해 매일 한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와 잠자리에 들 때는 반드시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했습니다. 첫돌이 갓 지난 자녀에게는 회초리의 매운 맛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수산나의 이런 철저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지독히 속을 썩이는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황소고집에 난폭한 성격 그리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친구들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수산나는 딸을 불러놓고 검정 숯 한 다발을 건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이 숯을 힘껏 안아보렴.” 딸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수산나가 채근했습니다. “이 숯은 뜨겁지 않단다. 불에 델 염려가 없어. 어서 안아보렴.” “그렇지만 손과 옷에 검댕이 묻잖아요.” 그때 수산나가 딸을 꼬옥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그릇된 행동이 너에게 화상을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의 영혼을 더럽힌단다.” 딸은 수산나의 지혜로운 교육에 힘입어 그릇된 행실을 버렸습니다. 숯댕이를 잡는다고 몸에 화상을 입지 않는 것처럼 그릇된 행실을 한다고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몸이 더러워지듯이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하나님과 코드를 맞출 때 우리의 행실이 더욱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3.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이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합니다(18,19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헛된 행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헛된 행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잘못된 습관이 폭력이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고백록」에서 제자 알리피우스의 나쁜 행실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는 착하고 학식도 있고 덕성도 좋은 젊은이였으나 원형극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경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이 거룩함에 대하여 강의를 할 때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깨닫고 검투사 경기가 벌어지는 원형극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알리피우스가 로마로 유학을 갔을 때 또 다시 검투사 경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는 친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큰 소리를 쳤습니다. "너희들이 내 몸을 거기에 끌고 간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과 내 눈을 결단코 그 경기로 향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알리피우스는 두 눈을 딱 감고 초연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수가 칼에 찔려 넘어져 우레와 같은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 때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습니다. 그러고서는 그 피 흘리며 쓰러진 검투사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옛날 행실이 다시 도져서 이제는 자기가 친구들을 충동질해서 원형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실화를 소개하면서 잘못된 행실을 끊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습관의 폭력'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 거기에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노예처럼 얽어매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알리피우스가 다시 과거의 나쁜 행실에 빠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 검투사 경기장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친구들에게 장담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가 옛날의 나쁜 습관을 끊고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나쁜 행실에서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면 더 심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사 다시 돌아갔을지라도 괴로워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함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산 여중생을 납치하여 살해한 김길태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아 준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헛된 행실에 대한 대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합니까? 19절 말씀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은금보다도 더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헛된 행실을 끓어버리지 못하거나 다시 헛된 행실로 돌아간 성도들은 보배로운 보혈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보혈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영혼만 헛된 행실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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