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돌변한 호산나
말 씀 : 마태복음 21: 1-9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을 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호산나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도 단순합니다. 그들이 불렀던 환영의 노래가 바로 ‘호산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료주일’이라고도 하고, ‘호산나절’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를 살펴본 이후에 백성들이 외쳤던 호산나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
인간의 죄를 범한 이유에 발전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건축술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이후에 도피하여서 제일먼저 한 일은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창4:17). 이처럼 인간은 성벽을 쌓아서 단절과 고립을 자초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립을 통하여 서로의 성벽을 점령하기 위하여 끓임 없이 전쟁을 해왔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성벽을 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벽을 허물고 길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의 성벽은 단절로 인해 외로움과 우울과 분노와 자기 연민으로 불행을 만듭니다. 마음의 성벽을 허물고 서로를 잇는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잇는 길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인간이 쌓은 모든 성벽을 허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견고한 성벽이 되어서 그 안에 갇혀만 있는 종교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고, 이웃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에게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길을 내시어 화목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웃과 성벽을 허물고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융화를 잘하는 사람들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4,2배나 높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외딴 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마음의 성벽을 허물고 길을 내는 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성벽을 허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마음의 성벽을 허물고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2. 돌변한 호산나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반응은 대단하였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마음을 다해 외쳤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호산나’는 금세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열렬히 환호하던 백성들은 불과 5일도 못되어 ‘예수’ 대신 ‘바라바’를 연호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하던 그 입술이 “바라바, 바라바”로 바뀐 것입니다. 지금도 사면제도가 있지만, 주님 시대에도 사면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국가경축일이 되면, 죄수들을 풀어주어 국가의 기쁨을 온 백성이 누리게 하는 제도입니다. 유대지역에서는 이 사면이 유대인들의 명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 총독 ‘빌라도’는 이 제도를 이용해 예수를 사면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재판을 해 보았지만, 예수에게서는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마 27:23). 게다가 지난 밤 아내가 예수와 관련된 꿈을 꾸고, 예수를 해치는 일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는 충고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 27:19). 그래서 ‘빌라도’는 누구를 사면할 것인지를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당연히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불과 5일 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호산나’ 대신 ‘바라바’를 외칩니다. 예수를 살리지 말고, 바라바를 살리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독립투사 바라바가 오히려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치던 입술로 ‘바라바’를 외치고 있습니다.
왜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들은 돌변하여 바라바를 외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론 조작 때문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예수는 죽여야 할 불한당이요, 바라바는 살려야 할 독립투사라는 조작된 여론이 형성되어 유포되었기 때문입니다(마 27:20). 그래서 백성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선동되어 ‘호산나’를 외치던 입술로 ‘바라바’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는 원래는 사람까지 죽인 강도였습니다(요 18:40). 그러나 성벽에 갇혀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독립투사로 조작을 하였습니다. 만약 바라바가 분명한 독립투사였다면 사면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 독립투사들은 로마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반역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로마에 직접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로마 허가 없이 자체적으로 사면을 해주는 것을 보아서도 그는 강도였지 독립투사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여론을 조작하여 강도를 독립투사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이 만들어 놓은 헛소문에 유혹되어 백성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돌변한 호산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혹시 돌변한 호산나를 외치면 살아가는 성도들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사람들의 말에 시험들고 상처받아 흔들리는 신앙은 돌변한 호산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교회밖에 나아가서는 세상방식대로 살아가는 것도 돌변한 호산나인 것입니다(예수님 믿는다고 직장에서 고립된 집사님 간증).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에 따라서 믿음의 굴곡이 심하다면 그것도 돌변한 호산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버티고 현상). 우리들의 돌변하고 있는 호산나가 불변하는 호산나가 될 때 반석위에 세워지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3. 불변의 십자가
우리들의 돌변하고 있는 호산나가 불변하는 호산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변하지 않는 호산나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불변하는 십자가와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는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호산나였지만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영원히 변화지 않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변한 호산나가 불변의 십자가와 연합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교회들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불변의 십자가 없이 호산나를 외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종교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십자가 신학의 강조를 통하여 허영과 위선과 교만에 부풀어 있던 중세교회를 예리하게 구별해낼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을 하다가 잡혀서 39세의 나이로 순교한 본훼퍼는 “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라는 흔들림이 없는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본훼퍼는 제자도에서 값싼 은혜와 값진 은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돌변한 호산나는 값싼 은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불변은 십자가는 값진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본회퍼의 제자도를 한국교회에 적용을 해보면은 성도들이 너무 값싼 은혜만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죄사함입니다. 값싼 은혜는 말씀을 따르지 않는 세례를 받으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됨이 없는 은혜입니다.
저도 값싼 은혜만을 전하는 목회자가 아닌가 라는 양심의 가책이 밀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제자반 훈련생들이 제출한 간증문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에 감사함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진 은혜를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눅14:27). 값진 은혜는 예수님이라는 천국 보화를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저에게 보내온 기도편지 한 대목에 값싼 은혜와 값진 은혜를 더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할 수 있는 값싼 은혜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사는 것은 어디에서나 할 수 없는 값진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이 땅을 향해 복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복음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살 때 복음을 말하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하는 복음이 아닌 살아지는 복음.... 이 시대 그런 값진 복음이 그립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값싼 은혜는 언제든지 돌변한 호산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값진 은혜는 불변하는 호산나가 되어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