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4일 부활 주일
설교 제목 : 내가 주를 보았다
말 씀 : 요한복음 20장 1-18절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천안함 침몰사고 이후 실종자 구출이 지연됨으로 인하여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46명의 실종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구조되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소망해봅니다. 천안함 침몰사고이후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의 속성 중 가장 저질스럽고, 치사스러운 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상입니다. 그럴듯한 설(說)이 생성돼 유포되다가, 사실이 아니면 슬그머니 연관성 있는 다른 유언비어로 비화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확대 증폭시키는 ‘중간 역할’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보다 유언비어가 더 많은 사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확대 재생산은 우리처럼 심하지 않다고 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객관적 사실을 보다 중시하고, 절제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천안함 원인이 확실히 밝혀질 때까지 지금보다 더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할 것입니다. 벌써 진보와 보수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언비어를 확대 재생산시키는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퍼뜨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중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면서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은혜를 간직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죄악의 담을 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만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깊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가가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는 어떤 처지였습니까? 너무나 비참하고 절망적인 환경이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습니다. 귀신 하나가 들어가도 사람이 미치는데 일곱 귀신이 들어갔으니 그의 정신상태가 어떠했겠습니까! 이천 년 전에는 여자는 사회에서 사람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냉대와 멸시를 받았던 시절입니다. 여자에게 귀신까지 들렸으니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면서 짐승처럼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이후로 일곱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통하여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난 이후에는 사는 목적까지 생겼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예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주님의 은혜를 간직한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바꾸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에 안장되었을 때 그 현장까지 따라가서 확인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부어드리고자 하여 새벽에 갔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갚으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절대로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삶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삶의 현장에서 증거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을 사랑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보여준 최고의 사랑의 표현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을 보면은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는 고백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가져가겠다는 말입니까? 무섭고 떨리는 일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넘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라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새벽미명에 무덤에 가서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모두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 미명에 무덤에 갔는데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3절에서도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15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상처와 아픔이 터져 나와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기구한 인생이 서러워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오늘 1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면서 너무나 다정스럽게 불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슬퍼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서 불러준 이름은 상처받아 메마른 심령을 단번에 해갈해 줄 수 있는 생수와 같은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처럼 상처받아 버림받은 인생에게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다가와서 이름을 불러주시며 치유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3.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될 수 있는 원동력은?
홈페이지에 들어가 제가 작년에 전했던 부활절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같았습니다. 핵심 내용은 마리아의 초점이 빗나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덤 안에 죽어있는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두다 보니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허물을 들추는 설교였습니다. 금년에는 마리아의 울고 있는 심정을 이해해보려는 긍정적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상처받은 제가 그래도 조금씩 치유되고 있나봅니다.
상처받아 눈물로 살아가는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18절 말씀을 보면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달라진 모습 아닙니까? 무덤에 찾아와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이후로는 너무나 당당하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상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 감정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처를 “어떻게 보이지 않게 하고 감출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처를 이용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이었지만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상처도 부끄러운 흉터로 남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치유 받고 다른 사람들을 치유 해 줄 수 있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상처받은 인생이 주님을 만난 이후로 치유 받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간 여인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주님이 만난 여인입니다. 남편이 다섯 명이 바뀔 정도로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인기피증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정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상처를 피해가지 아니하고 직면하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의 말이 옳다고 인정을 해 줍니다. 여기서 바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잡아먹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는데 처음으로 옳다는 인정을 받아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을 받자 대인기피증을 이겨내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피해 다녔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찾아가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상처가 치유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어서 다른 영혼들을 치유해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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