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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장 25-32절/ 5월 30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6-01 추천 0 댓글 0 조회 500

2010년 5월 30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아버지의 마음

말 씀 : 누가복음 15장 25-32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6월 2일 수요일은 지방선거 날입니다. 우리나라 선거는 바람 선거라고 합니다. 바람이 불러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6·2 지방선거 역시 바람 선거를 치루고 있습니다. 여당은 북풍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야당은 노풍의 바람이 더 강하게 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후보자들은 허풍처럼 지나가는 바람 공약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유권자들은 바람세기 위하여 소풍 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번 지방 선거는 “여당의 북풍과 야당의 노풍과 후보자의 허풍과 유권자의 소풍의 네 가지 바람 중 어느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느냐?” 에 따라서 결정될 것 같습니다. 이미 정책 선거는 실종되고 비이성적 차원의 바람에 따른 이념대결만 난무합니다. 이것이 정치권의 현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에겐 비전이 없습니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가장 훌륭한 목민관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버지의 마음을 지닌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지역 주민들을 가족처럼 돌볼 수 있는 인물들이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 연결되어서 이어지고 있는 ‘집안의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마음과 첫째 아들 마음이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간에 대립을 하고 있는 이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절반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창녀들과 함께 다 허비하고 다시 집에 돌아온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대하는 마음속에서 믿음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이 동생을 대하는 마음속에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믿음의 가치관과 첫째 아들의 세상의 가치관은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만약 세상의 가치관을 가치고 있다면 믿음의 가치관으로 변화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1. 물질과 생명 사이에서

제일 먼저 아버지와 첫째 아들이 보여주는 첫 번째 충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첫째 아들을 통하여 생명과 물질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가치관은 물질을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30절에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의 생명보다도 잃어버린 물질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여주는 믿음의 가치관은 물질보다도 생명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32절을 보면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고 합니다. 물질을 잃어버렸을지라도 둘째 아들의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체코의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딸 마르타가 경영하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렸을 때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린 모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범죄에 빠져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이 많은 투숙객이 들면 수면제를 먹인 후 돈을 빼앗고는, 독약을 먹인 후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말쑥한 차림의 한 청년이 여관을 찾았습니다. 모녀는 청년에게 독약을 먹인 후 강물에 던졌습니다. 여인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피살자의 신분증을 보고 절규합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아들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도 아들을 던진 그 바다에 뛰어들고 맙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난 후 크게 성공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귀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카뮈의 희곡 ‘오해’의 줄거리입니다. 물질을 쫓다보니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가 생명을 중시하는 야훼 하나님과 물질을 중시하는 바알이라는 우상과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중시하는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중시하는 바알신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생명을 중시하는 믿음의 가치관과 물질을 중시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중시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늑대가 양의 탈을 쓴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인 냥 둔갑하여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처럼 평가받고 있습니다. 신앙의 인격 됨됨이가 잘못되어 있더라도 물질의 양으로 덮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물질을 우선시하는 바알 신이 아니라 생명을 더 우선시하는 야훼 하나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현실과 약속 사이에서

이제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두 번째 충돌은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가치관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취하는 것입니다. 오늘 29절 말씀을 보면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고 합니다. 지금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여주는 믿음의 가치관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오늘 31절 말씀을 보면은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결국은 아버지 것이 모두 그의 것이 될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 흐르는 중요한 믿음의 흐름 중 하나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잡은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무엇입니까? 아낙의 장대한 자손들과 같은 원주민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죽으면서 가나안 땅에 무덤 하나 남겼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미래에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붙잡고 죽었습니다. 또한 성경 속에서 전쟁이 나고 나라가 빼앗길 위기에 처했는데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을 아십니까?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촌 하나멜이 와서 아나돗의 밭을 사라고 하면 그 밭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라면 곧 나라가 망할 텐데 밭을 살 이유가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는 장차 유다가 회복될 것에 대한 미래의 약속을 붙잡은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절망스럽지만 장차 잃었던 땅을 회복할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이 담긴 행동이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씨앗하나 심으며 미래의 약속을 붙잡고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약속보다도 현세의 축복을 더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이미 세상의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가치관은 미래의 약속을 위해 현세에 누리는 것들을 포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정죄와 사랑 사이에서

아버지와 첫째 아들이 보여주는 마지막 충돌은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가치관은 동생을 정죄하는 율법적인 태도였습니다. 돌아온 동생이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렸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정죄하는 마음에는 자기 의로움이 담겨져 있으며, 용서하는 마음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여주는 믿음의 가치관은 둘째 아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태도였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살찐 송아지를 잡고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향하는 마음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필립 얀시가 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사기 위해 딸을 사창가에 팔아먹고는 그 양심에 찔려 괴로워하는 사람이 저자를 찾아 왔더랍니다. 그래서 저자는 어렵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왜 교회에 가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 물음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교회요! 왜 거긴 뭐하러 가요? 그렇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그곳에 가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 속에 용서하는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율법이 더 강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헨리 로런드는 “한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데는 적어도 20년이 걸리지만 어떤 다른 사람이 악심을 품고 그를 바보로 만드는 데는 불과 20분이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첫째 아들의 정죄하는 힘은 결코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거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힘은 언제나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까? 물질과 생명 사이에서, 현실과 약속 사이에서, 사랑과 정죄 사이에서 여러분은 어떤 가치관을 붙잡기를 원하십니까? 부디 첫째 아들의 세상의 가치관을 붙잡는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믿음의 가치관을 붙잡은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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