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예수님의 좋은 병사
말 씀 : 디모데 후서 2장 1-4절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0. 들어가는 글
벌써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찾아 왔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문을 활짝 열어놓는데 여기저기에서 문들이 닫히고 담장들이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대화도 교류도 소통도 하지 않겠다는 단언은 온통 초록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에 겨울 소식처럼 다가옵니다. 요사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라는 복음 성가 가사입니다. 이번 지방 선거 결과를 보면은 지역감정의 담장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이제는 세대 간의 갈등과 빈부간의 담장이 날로 높아만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또한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 주변에 높아진 담장들이 무너져 내리고 소통의 길들이 열리기를 소망해봅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한 병사들이 있듯이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좋은 병사들에 대하여 나누어 볼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의 좋은 병사는 고난을 함께하는 병사입니다.
예수님의 좋은 병사는 어떤 병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3절에서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합니다. 고난을 함께 받는 병사가 예수님의 좋은 병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좋을 때는 함께 하지만 힘든 고난 속에서는 떠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떠나지 아니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주님의 좋은 병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축복만 받는다면 예수님을 떠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축복은커녕 힘든 일이 자꾸만 생기니 신앙의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연안에 있던 고대 도시 폼페이는 최절정기의 상업도시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AD 79년에 로마 황제 티투스가 등극할 때 화산이 대폭발하였습니다. 2-3m 두께의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서 온 도시는 삽시간에 매몰되어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거의 천칠백년이 지나서 폼페이 도시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는 엄청난 재앙의 절박한 순간 속에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발굴되었습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에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숨진 것도 있었고, 어떤 여자아이는 손에 황금노리개를 그대로 움켜 쥔 채 달리다가 넘어진 자세로 숨져있었습니다. 또한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여 웅크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굳어버린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부분은 성곽을 지키는 로마병정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소에서 자리를 지키다 의연히 죽음을 맞이한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그 로마병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꼼짝 않고 창을 들고 서있는 참 군인의 모습으로 발굴된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처럼 화산이 폭발한다면 “이 로마병정처럼 도망가지 않고 내 자리를 끝가지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 보았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내가 있어야 할 믿음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제일 먼저 도망치는 연약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어떠한 사단의 공격이 있을 지라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킨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좋은 병사는 시세를 아는 병사입니다.
예수님의 좋은 병사에 대해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역대상 12장 32절에 보면은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고 합니다. 다윗 왕이 왕으로 등극할 때 다른 지파들은 수천명씩 나와서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잇사갈 지파는 단지 이백명의 소수만 나와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에게 너무나 좋은 병사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시세를 알았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은 많은 병사들보다 다윗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유가 무엇이냐?” 고 저에게 묻는다면 여당에서 여론조사만 무조건 믿다보니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좋은 병사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 시세를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 시대를 아는 자만이 그 시대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룡의 멸종원인은 고온 다습하던 환경에 살던 공룡이 저온 건조한 기후에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1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아그파 필름의 몰락도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아날로그만을 고집하였던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서로 소통을 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날로그식으로만 밀어붙이는 것에 대하여 지금 정부에서 반드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옳은 일이라고 성도들과 전혀 소통도 없이 밀어붙이다면 납득할 성도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마땅히 행할 것은 아는 자들이 많이 있을수록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지시와 간섭을 받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마땅히 행할 것은 아는 성도님들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심정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을 하면은 정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당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마땅히 행할 것을 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행할 것이 반드시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시세를 아는 것과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서로 보완 관계입니다. 시세를 안다는 것이 시대의 흐름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세를 알기에 하나님을 앞에서 마땅히 행할 것은 아는 것이 균형 잡힌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좋은 병사는 충성된 병사입니다.
우리가 좋은 병사에 대하여 언급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빠질 수 없는 것이 충성된 병사입니다. 오늘 2절 말씀에서도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충성된 장면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사무엘하 23장에서 나오는 첫째 삼인의 용사가 다윗에게 얼마나 충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무엘 하 23장 15절에 보면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그 말은 지금 당장 물을 먹겠다는 뜻도 아니고 부하들에게 당장 물을 떠오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 용사는 다윗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담고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깨달은 은혜는 충성은 말씀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중요한 말씀도 대충 흘려듣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지 않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마음에 담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여기서 더 묵상할 수 있는 은혜는 사무엘 하 23장 16절에 보면은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물을 길으러 갔을 때 출발부터 돌아올 때까지 적군과 계속적인 충돌만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적진을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웠겠지만 물을 길은 후 뚫고 나오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웠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싸운 것은 자신들의 무술이 아니라 왕을 향한 충성심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어떤 난관에서도 그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 따라 상황 따라 변하는 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닙니다.
미국 서부에서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나귀와 같이 묶어 놓는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야생말이 콧방귀를 뀌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끌고 다닙니다. 나귀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며칠 뒤에는 야생말이 지칠 대로 지쳐서 나귀가 말을 끌고 옵니다. 처음에는 말이 나귀를 우습게보지만 나중에는 나귀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당나귀의 인내심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충성한다면서 망아지처럼 하면 안 됩니다. 별 일 없을 때는 혼자 충성을 다하는 것같이 소리치다가 진짜 충성할 일에는 뒤로 숨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은 기분 따라 감정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이란 순경이든지 역경이든지 변함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때에 좋은 병사를 찾고 계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시세를 알과 마땅히 행할 것은 아는 자들이 되며, 말씀을 흘려드는 것이 아니라 새겨듣고 충성하는 좋은 병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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