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0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서로를 세워줌
말 씀 : 사도행전 15장 1-11절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도 온통 월드컵 열기입니다.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은 붉은 티와 응원 열기가 여름의 무더운 날씨보다도 더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이 아르헨티나에게 패해서 아쉽지만 마지막 예선 경기인 나이지리아와 최선을 다하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친정 교회에서 주최하는 신학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강의도중 유난히 졸고 있는 목사님들이 많았습니다. 밤늦게까지 축구 중계를 보는 목사님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새벽시간에 북한과 브라질 경기가 있었던 날은 목사님들이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비몽사몽간에 졸면서 주님을 만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는 일이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박응천 교수님의 바울 신학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을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서울 한신교회와의 만남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떠난지 8년의 세월이 친정 교인들과의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었을까요? 한신교회 성도들과의 만남이 불편한 이유는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만남이 아니라 개척한 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는지의 호기심들 이었습니다. 서울 한신교회에서 개척을 지원해서 성공을 했으니 한턱내라는 농담 썩인 말들이 저를 너무나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베푼 자의 입장과 받은 자의 입장에서 생기는 불편함이 저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교회와 같은 서울 한신교회에 대한 고마움과 왠지 모를 불편함속에서 멀리하고 픈 마음이 함께 공존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초대 교회의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와 새로 생겨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간의 갈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양측 교회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종교 회의를 통하여 두 교회간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삶속에서 생기는 서로간의 갈등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예루살렘 종교 회의가 열리게 된 이유?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은 이후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진 교인들 때문에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5절).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고 율법을 지키면 샬롬의 평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공동체의 맴버쉽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도 이런 우를 동일하게 범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세례만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멤버쉽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을 평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사과 같은 믿음이 되지 말고 토마토 같은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과처럼 겉만 빨간 것이 아니라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모두가 빨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11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님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구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안디옥 교회의 할례 없이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의견이 충돌하여 많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2절).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다툼이었다고 말하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은 예루살렘 교회를 속담의 바위로 비유한다면 안디옥 교회는 계란에 불과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계란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교회 규모를 보더라도 골리앗과 같은 예루살렘과 다윗과 같은 안디옥의 싸움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문제를 중재하기 위하여 양측 교회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최초의 종교 회의가 주는 의의는 어머니와 같은 큰 교회가 이제 갓 생겨난 어린아이와 같은 안디옥 교회를 회의의 파트너로 인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들의 힘으로 안디옥 교회를 누를 수가 있는데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은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2. 중재자로 나선 베드로
예루살렘 종교 회의에서 많은 변론들이 진행되었습니다(7절). 예루살렘의 할례파와 안디옥의 무할례파가 팽팽하게 대립을 하였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강하게 대립을 하다보니 도저히 해결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된 가운데서 이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7절).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는 일을 망설이고 있을 때 주님은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이 세차례나 내려오면서 먹으라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율법의 정결법에 의하여 부정한 음식이니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합니다(행10:15). 고정관념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됩니다. 잘못하면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주님의 말씀까지도 부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에 설교를 초청받아 같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설교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휘바람을 불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공공장소에서 휘바람을 부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한다는 경직된 고정관념이 오히려 말씀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율법의 정결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증거함으로 놀라운 체험을 경험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함으로 체험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8절). 두 번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9절). 세 번째로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11절). 베드로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함으로서 중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살렘 교회의 힘에 의해서 눌리던 안디옥 교회의 입장이 인정을 받는 분의기로 전환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하여 미리 베드로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운 뿐입니다.
3. 결론을 내리는 야고보
베드로의 중재에 이어서 종교회의의 최종적인 결론을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은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야고보가 최고의 의장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양측 교회의 공존을 선택하였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22절). 믿는 방법은 달라도 서로가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결론으로 인하여 초대교회가 갈라지지 아니하고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점이 있다하여도 배척하지 아니하고 윈윈 전략을 택하였습니다. 조금만 달라도 갈등하고 나누어지는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점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다툼 속에서 어느 교회가 오른지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결론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이 자신의 입장으로 옳고 그름을 쉽게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판결을 유보하고 어찌보면 하나님의 판결에 맡긴 것입니다. 야고보의 결론 내용을 깊이 들어가보면은 두 교회의 공존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택의 기준은 오늘 16절 말씀에서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성전처럼 눈에 보이는 건물 중심이 아니라 장막일지라도 다윗처럼 예배를 뜨겁게 사모하는 자를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더 순종하는 교회에게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종교회의를 보면서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나와 모습은 다를지라도 상대방을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판결은 사람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다윗처럼 마음을 다한 예배의 장막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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