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창세기 16장 1-10절
말 씀 : 하나님은 누구편인가?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한반도는 온통 월드컵 열기였습니다. 한국이 월드컵 원정 처음으로 16강을 진출하였기 때문입니다. 16강 진출을 결정한 이후 그라운드에 한참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이영표 선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축구대표팀 수비라인의 맏형인 이영표 선수는 “하나님을 위해 축구를 한다”고 늘 말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으로 동료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당한 후배 이동국 선수에게 “8년 전 월드컵 직전 나도 부상을 당했지만 기도의 힘으로 이겨냈다. 동국이도 이번 기회에 믿음을 가져 보길 바란다”고 격려하면서 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영표 선수 미니홈피 제목은 ‘하나님께 효도하자’ 라고 합니다. 그는 대문 글에 “하나님은 나를 성공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순종하라고 부르셨습니다”라고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글이 저를 감동시키면서 마음속 깊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성공과 순종사이에 갈등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없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공은 모래위에 세운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성공은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서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풍랑의 현장으로 뛰어든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순종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어 보고자 합니다. 그 결과 가정 속에서 어려운 갈등을 초래하게 됩니다. 바로 사라와 하갈의 갈등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 가정 속에서 일어난 갈등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하나님과의 약속이 흔들리는 아브라함
하나님은 사라를 통하여 믿음의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3절). 몸은 늙어가면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초조해진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제안을 합니다. 2절 말씀에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고 합니다. 여기서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아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말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직 때가 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처럼 자신의 판단으로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라의 제안은 당시의 관습법이었습니다. 결혼한 여주인이 출산을 못하는 경우 여주인의 종이 대신하여 남편의 후사를 낳아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주인의 종이 아이를 출산할 경우 한 가족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제안한 쉬프카 관습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거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드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2절 후반부를 보면은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고 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연상이 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도 하와의 말을 듣고 동반 타락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할 수 있는 견고한 믿음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당시의 관습법을 통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였던 아브라함의 부부는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방법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어 주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박주영 선수가 마지막 경기에서 16강에 올라가는 결정적인 골을 넣고 기도하는 장면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박주영 선수의 미니 홈피에 들어가면은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이루신다” 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심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이 언약을 어겼음에도 왜 처벌받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서 물음을 하나 던질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왜 벌을 내리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어떤 언약을 맺었느냐? 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는 쌍방간의 행위 언약과 일방적인 은혜 언약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쌍방간의 행위 언약을 맺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맺었기에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창세기 15장에 나와 있는 햇불 언약을 보면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짐승을 쪼개어 하나님과 언약을 준비했습니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면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왜 완전한 어두움이 임할 때 언약을 체결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일방적 은혜의 언약 의미로 들어가서 고대 족장시대에 계약을 맺을 때 당사자들이 짐승을 쪼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손을 잡고 지나가면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위반했을 때 짐승들이 죽은 것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 17절을 보면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햇불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함께 지나갔으면 쌍방간의 행위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햇불만 지나가는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약속을 어겼지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쌍방간의 행위 언약을 통해서는 육신이 연약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이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도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라와 하갈의 갈등 사이에서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고 있는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임신을 하였습니다(4절). 쉬프카의 관습법에 따라서 한 가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임신한 애굽의 여종 하갈은 주인을 멸시합니다(4절). 이로 인하여 둘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심해지자 결국은 여주인 사라가 임신한 여종 하갈을 학대하여 도망치게 만듭니다(6절). 여주인과 여종 둘다 잘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을 통하여 약속을 이루고자 했던 그 결과의 후유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여인의 갈등사이에 낀 남편 아브라함은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간이 사고를 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강자인 사라의 편입니까? 아니면 약자인 하갈의 편입니까? 하나님은 억압하는 사라의 편입니까? 아니면 억압당하는 하갈의 편입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오늘 말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은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자인 사라편도 약자인 하갈편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이 다같이 “더불어서 함께 사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주인 사라와 몸종인 하갈이 함께 살아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사라를 통하여 이삭이 출생한 이후에 다시 잠잠했던 갈등이 폭발합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적자인 이삭과 서자인 이스마엘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자인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물려주셨지만 서자인 이스마엘에게도 생존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창21:17-18절). 하나님은 한쪽이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 생존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짓고 난 이후에 끓임없이 갈등의 역사였음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 가 죄를 짓고 난 이후에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적자와 서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출애굽시대 이후로는 민족과 민족의 갈등으로 전개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민족간의 갈등도 이념간의 갈등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갈등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더불어 사는 길”을 촉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인간들의 갈등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방법으로 이루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때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길은 쌍방간의 행위 언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 언약인 십자가의 사랑을 붙잡아야 살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샬롬의 평화가 가정과 교회와 민족 속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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