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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삶/ 창세기 39장 1-6절/ 7월 1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7-12 추천 0 댓글 0 조회 644

2010년 7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형통의 삶

설교 말씀 : 창세기 39장 1-6절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0. 들어가는 글

저는 지난주 이중표 목사님 5주기 추모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한국 민족을 사랑해서 교회 이름을 한신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100개 교회를 개척하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비전에 따라 김포한신교회가 60번째로 세워졌습니다. 추모 예배의 설교는 이중표 목사님이 살아생전에 선포하셨던 설교 동영상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설교 제목은 지금으로부터 10전에 선포하셨던 “민족을 살리는 비전”이었습니다.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첫째로 복음을 살려야 하고, 둘째로 양심을 살려야 하고, 셋째로 평화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양심을 살려야 한다는 대목에서 나라에 봉사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노동으로 봉사하고, 지식으로 봉사하고, 양심으로 봉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이 양심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목사님의 설교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민족은 심히 혼란 가운데서 국론은 분열되어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너무나 사랑했던 목사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실까?” 너무나 궁금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자신의 민족을 너무나 사랑했던 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히브리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 가운데서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대기근 가운데서 자신의 민족이 멸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어려운 시대에 요셉과 같은 지도자를 세워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국운이 상승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고그와 같은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민족 속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1. 형통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형통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형통의 삶이 무엇인지 증명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도 하반기에는 진심으로 형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요셉이 보여주는 첫 번째 형통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2절 말씀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라고 합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은 요셉은 형통한 삶이 아니고 꼬이기 시작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들로 지내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린 것을 어떻게 형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요셉의 인생이 곤두박질하여 비참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 있을 때는 형통하다는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서 노예로 살기 시작할 때부터 요셉에 대하여 형통한자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하나님보다도 아버지를 더 의지할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서 떠난 이후에는 요셉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적인 의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한 삶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형통의 삶에 대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되느냐? 못되느냐? 가 형통의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느냐? 가 형통의 기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형통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형통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형통의 삶은 내가 머문 자리를 복 있는 자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애굽의 집에 복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애굽의 집에 복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5절 말씀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집에 요셉 때문에 복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우리가 머문 자리를 하나님의 복이 내리는 자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의 현실을 보면은 복이 내려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요셉의 신분은 노예요, 그가 머문 장소는 애굽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은 신분이나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복이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분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내가 머문 자리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형통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비록 노예로 있을지라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아니하고 형통의 복이 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인집에 내려 주신 것입니다. 저는 서울한신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대략 10년을 섬겼습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교회 경비를 서면서 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회 머슴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제 신세는 머슴처럼 초라했어도 맡은 부서에 대해서는 부흥이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맡은 부서마다 잘되는 형통의 복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섬기는 동안 서울한신교회가 놀랍게 부흥하였습니다. 분당에 민족 성전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중표 목사님에 형통의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머슴처럼 섬겼던 저를 보시고도 주님이 형통의 복을 내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이중표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감동하고 흘리는 눈물에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것처럼 저는 목사님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갑절의 영감을 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요셉처럼 원하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형통의 복이 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육적인 만남은 형통의 사람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애굽의 군대 장관 보디발의 집안이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은 자신들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요셉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집안은 요셉 때문에 누리는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육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외모는 바라보았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은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만남은 육적인 만남이 아니라 영적인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육적인 만남은 처음에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관계가 결국은 갈등 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이중표 목사님을 부교역자로 섬길 때 육적인 생각을 가졌다면 그분의 허물을 보고 도중에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섬기며 만나고자 했을 때 육적인 허물은 덮어지고 영적인 은혜를 계속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전북 금산에서 형통의 복이 크게 임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을 통하여 양반과 머슴이 동시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양반집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인수가 증가하여 장로를 선출하였습니다. 그 집 머슴이었던 이자익은 장로로 선출되고 양반인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발언권을 얻어서 우리 집 마부가 장로로 선출된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문에 금산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양반 조덕삼은 배 밭을 기증하고 ㄱ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튼을 쳐서 여성도 좌석을 마련하자 원근각지에서 여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교인증가로 다시 장로를 선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낙선한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금산교회는 말할 것 없이 금산리에 사는 주민 모두 좋아했고 교회는 더욱 부흥되었습니다. 이때 양반 조덕삼 장로는 머슴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그를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전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지원하기로 하였고 금산교회는 또 한번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금산 교회 2대 목사님으로 이자익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머슴이었던 이자익 목사님과 양반이었던 조덕삼 장로가 마음을 모아 섬기자 금산 일대에 놀라운 형통의 복이 임하였습니다. 1950년 6·25 전쟁시 금산리 마을이 다 불바다가 되어 온 마을주택이 다 전소되는 사건 속에서도 금산교회는 불에 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좌익이나 우익이 한결같이 “저 교회는 우리 교회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양반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을 육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머슴 이자익을 통한 형통의 복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양반 조덕삼이 머슴 이자익을 영적으로 섬길수록 그에게 더 많은 형통의 복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산 지역 일대에도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놀라운 형통의 복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일이 잘되는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머문 자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형통의 복이 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것을 육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대하여 형통의 축복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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