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설교 말씀 : 출애굽기 14장 9-14절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0. 들어가는 글
어제 장마비속에서 진행되는 유치부 성경학교에서 어린 영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귀엽고 예뻤습니다. 그 영혼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사회는 희망과 절망사이에 있습니다. 먼저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울산에서 강동주 소방장은 지난 2일 화재 신고를 받고 4층 주택으로 출동했습니다. 주택은 시커먼 연기와 불에 휩싸여 있었고 작은방으로 피한 모자 3명은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든 강소방장은 어린이 두명을 몸으로 감싸고 5분여를 버텼고 그사이 동료들은 창문을 통해 모자 3명을 구조했습니다. 동료들이 강소방장을 구하는 데 다시 5분이 흘렀는데 화마는 방화복을 뚫고 들어와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 어깨 등에 2∼3도 화상을 입혔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한 강소방장의 살신성인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절망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17일 서울 신천역 먹자골목에서 10대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한 양모씨가 병원으로 옮겨진 지 20일 만에 숨졌습니다. 사소한 시비 끝에 싸움이 벌어졌지만 10대 학생들을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한 시민은 없었습니다. 결국 양씨는 가해 학생들이 현장을 떠난 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지난 6일 숨졌습니다. 특히 양씨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도 헤어진 뒤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고아원으로 보내진 외로운 신세로 알려져 주변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대로에서 맞아 죽는데도 이토록 무심해도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한없는 절망감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한 민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히브리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드디어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뒤에서는 마음을 바꾼 바로의 군대가 추격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닥쳤을 때 자신 안에 숨겨진 성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 민족도 진퇴양난의 순간에 자신들의 숨겨진 성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드러나는 성격은 책임회피였습니다. 오늘 말씀 11절 보면은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고 합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노예생활을 하는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자유를 찾아서 스스로 따라온 것입니다. 자신들이 선택한 일에 대하여 위기가 닥치자 책임회피를 하고 있습니다. 책임회피를 통하여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책임회피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어봅니다. 아담은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회피를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와서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가인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우리는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여 회복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드러나는 성격은 극단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11절에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또한 12절에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합니다. 죽음에 빗대어서 말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반복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성격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생겨난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어려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편협적인 사랑을 받은 경우 생겨납니다. 히브리 민족이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성인아이가 된 것은 어려서부터 종살이를 함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충분한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일에만 부닥치면 극단적인 생각으로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함으로 형성된 성인아이의 상처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의 상처가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으로 치유됨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드러나는 성격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2절을 보면은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합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430년 동안의 노예의 생활에서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진퇴양난의 위기가 닥치자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습니다. 50년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낸 브룩스를 통해서는 길들여진다는 것의 무서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룩스는 몇십년을 감옥에서 살다보니 사회로의 복귀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가석방되어 출소하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끝내는 자살하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길들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노예 생활로 길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로 길들여지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진퇴양난 속에서의 믿음의 법칙
이제 히브리 백성들과 다르게 진퇴양난을 극복하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두려워 말고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13절). 여기서 구원을 보라는 의미는 은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을 보면은 ”하나님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히브리백성들은 은혜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구원만큼 내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을 은혜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신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두 번씩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13절에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14절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게 받은 은혜는 히브리 민족의 지금 상황이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과정을 부각시켜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사탄은 ‘결과적인 복’은 감추고 ‘핍박과정’만 부각시켜 믿음을 포기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진퇴양난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있음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가만히 서서”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13절의 “가만히 서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기다리라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NIV 영어성경에는 "stand firm" 견고하게 흔들리지 말고 서있으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크게 받은 은혜는 “가만히 서서” 너희들이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경험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난날에 받았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 적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어려움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제 받은 축복에는 감사하면서도 오늘 적용하지 못합니다. 지난날에 은혜를 주셨으면 반드시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은 어울리지 않은 낡은 배낭을 자기 방에 걸어 놓고 뭔가 잘 안 풀리고 어렵고 힘들 때면 가만히 서서 그 배낭을 쳐다본다고 합니다. 6.25사변 때 전쟁터에서 총알에 맞아 쓰러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배낭에 세발의 총알에 맞은 구멍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죽지않고 지켜주신 하나님을 믿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 배낭을 가만히 서서 봅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용기가 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가만히 서서 지난날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다시 떠올리면서 동일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절망으로 가는 책임회피와 극단적인 생각과 세상에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으로 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가만히 서서 지난날에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은혜 베푸심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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