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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원한의 의미/ 누가복음 18장 1-8절/ 9월 5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9-06 추천 0 댓글 0 조회 586

2010년 9월 5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과부의 원한의 의미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8장 1-8절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두 살배기 아이와 엄마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이혼 당했습니다. 엄마는 이를 악물고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두 살배기 아이를 훌륭하게 양육하여 군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TV를 통하여 자신의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실종 이유가 올 상반기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천안함 침몰 사건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당하고 혼자 몸으로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하늘이 무너지도록 가슴이 아렸습니다. 천안함 전사자 중 1명인 정범구 병장 가족의 사연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살 때 어머니와 이혼해 줄곧 생면부지로 지내왔던 친부가 최근 사망보상금을 ‘몰래’ 찾아간 것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모르고 호적을 그대로 나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정병장의 어머니 심씨 가슴이 얼마나 새까맣게 멍들었겠습니까? 그녀의 가슴에 많은 한이 맺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한 맺힌 여인이 등장합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을 괴롭게 할 정도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과부의 원한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기도응답에 관한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본문의 비유는 과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재판장을 번거롭게 할 정도로 찾아다니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장도 응답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단순한 기도 응답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과부와 재판장 비유를 보면서 놓치는 부분이 과부의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개는 물질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원한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어떤 원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여 죽고 싶을 만큼 깊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이처럼 과부의 원한은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비장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차원의 원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매달리며 기도해야 하는가? 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린 비유의 결론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부분입니다(8절). 이 결론에 대하여 앞부분을 기도 응답으로 해석하여 기도가 믿음이요, 믿음이 바로 기도라고 연결시킵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도 끝까지, 꾸준히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해석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비유는 과부의 원한으로 시작이 되었고, 결론에서도 원한과 믿음을 한 구절에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다시 보면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믿음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한과 믿음을 연결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2. 과부의 원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과부와 재판장 비유를 풀어가는 실타래를 하나 찾았습니다. 원한과 믿음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부의 원한이 무엇이냐?"를 바르게 이해할 때 믿음과 연결 짓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원한은 이미 언급한대로 자신의 힘으로 풀 수도 없으며 주변에서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끝내고 싶은 절망적인 심정입니다. 이런 원한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원한을 영적인 원한이라고도 하며, 또한 원초적적인 원한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가 영적인(원초적인) 원한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나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 절망스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에서야 저도 청년 시절에 원초적인(영적인) 원한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거룩해지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 때문에 한 없이 절망했습니다. 그 때의 몸부림이 원초적인(영적인) 원한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한이란 삶에서 비롯된 억울함 일수 있습니다. 그 원한은 불공평과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태어난 조건 때문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앞으로 삶의 행복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조건의 사람은 일평생 평탄한 삶을 살 수 있고, 나쁜 조건의 사람은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살기도 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 때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해본 적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라도 불공평한 세상을 바꾸어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로는 그런 원한도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 본 영적인 원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 철저하게 부패되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죄로 손상된 인간의 상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세상에서 억울한 원한은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처한 영적인 원한은 도저히 어떠한 인간의 힘으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만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부의 원한을 영적인 원한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이기적인 기도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것으로만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이 자신의 죄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절규하고 있다는 영적인 원한을 발견할 때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3. 영적인 원한은 하나님과 가장 깊은 믿음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영적인 원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림으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한 영혼이 죄로 부패한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되면 예수님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할 수 있는 영혼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8절).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누가가 이미 9장 23절에서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이제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더 자세히 풀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영적인 원한의 상태에 직면한 적이 있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주님을 닮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내 자신의 괴로움이 영적인 원한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과부처럼 영적인 원한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해결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해결 받을 때까지 과부처럼 끈질기게 매달렸다면 자아를 부인하는 믿음을 가지고 더 많은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영적인 원한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받지 못했기에 내 자아가 완전히 죽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지 못한 증상이 올 여름에 또 나타났습니다. 올 여름 기간을 나름대로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지치고 몸까지 힘들었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내 안에서 많은 영적싸움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영적인 슬럼프가 찾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 자아가 십자가 아래서 온전히 죽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원주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원주민들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어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런 옆구리에 가시와 같은 괴롭힘이 내 자아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믿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는 숫자가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 영적인 원한의 문제를 해결하여 자아가 죽은 믿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완전히 죽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부패한 자아가 영적인 원한이 되어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깊이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 의 차이입니다. 과부처럼 영적인 원한을 가지고 예수님께 끈질기게 매달려서 완전이 자아가 죽는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자아가 죽은 진정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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