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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 히브리서 4장 12-16절/ 9월 19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9-19 추천 0 댓글 0 조회 817

2010년 9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죽은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

설교 본문 : 히브리서 4장 12-16절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0. 들어가는 글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명절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최근 과학과 무신론이 손을 잡고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무신론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이 “만들어진 신”라는 저서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며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최근에는 스티븐 호긴스 라는 물리학 교수가 ‘위대한 설계’ 라는 저서를 통하여 또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며 도발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논쟁을 벌였던 크리스챤 맥그래스 교수가 스티븐 호킹에게도 반론을 제기하여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맥그래스 교수는 스티븐 호킹이 과학을 과장과 추측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깅은 우주가 신이 아닌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맥그래스 교수는 중력 법칙은 어떤 상태가 발생한 결과에 대한 설명이지 중력 법칙이 특정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럴리 없지만 백번 양보하여 중력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가정하여도 다른 난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한 중력은 어떻게 생겼느냐? 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전혀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맥그래스 교수는 이를 축구경기를 예로 들며 설명합니다. 운동 경기장에 축구 선수가 없는 데 운동 법칙으로 골이 들어간다고 설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말씀 창조 신앙고백이 견고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말씀이 내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죽은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변화 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죽은 말씀은 우리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죽은 말씀은 단지 지식적으로 연구하는 자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만큼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말씀을 연구했지만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연구한 말씀을 자신들은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연구하여 많이 알고 있어도 죽은 말씀이 되면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말씀을 가진자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단지 관심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교회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격도 그대로며 습관도 별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관심은 바꾸었는데 인격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가라지 역할을 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관심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알곡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죽은 말씀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지적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상고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없다는 것입니다"(요5:42).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 정말 주님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고3학년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바로 신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와 경제적인 문제의 이중고를 거치면서 신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좌절감을 겪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시에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아마도 바로 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면 주님을 만났지만 사랑이 깊지 못하여 죽은 말씀으로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많은 연단과 훈련 속에서 군대를 제대한 이후에 신학교에 진학을 하였습니다. 그 기간을 지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학을 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2. 살아있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의 날선 검이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오늘 13절 말씀을 보면은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갬으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부모는 더럽혀진 아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쓰다듬어 주고 예뻐해 주기 이전에 먼저 벌거벗겨서 더러워진 것들을 씻어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진정한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죄악으로 더러워진 영혼을 먼저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씻는 것을 좋아할리 없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도 자신의 더러운 죄악이 드러날 때, 아주 당황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는 온몸을 씻어야 하고 그리고 손발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군대 가기 전에 잠시 동안 광산촌에서 태어났기에 광산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갱 속의 어둠속에서 얼굴을 비롯하여 온몸에 묻은 탄 먼지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갱 밖으로 나오면 밝은 빛 속에서 내 몸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살던 우리들은 우리 안에 죄가 있는지를 잘 알지 못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앞으로 나오면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지를 알게 됩니다. 참으로 빛 되신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의 죄가 많이 드러났습니다. 드러나는 죄 때문에 참으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저를 주님이 말씀으로 씻는 사랑의 과정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죄를 드러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손길로 더러운 죄를 씻어 줍니다. 죽은 말씀으로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인인 채 행세하며 변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3. 살아 있는 말씀은 영을 해방시킨다.

살아있는 말씀은 사람의 혼과 영을 분별하게 만듭니다. 12절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이 죽은 상태로 혼에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적인 삶을 사는 신앙은 말씀이 지식적인 차원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죽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혼적인 삶을 사는 신앙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는 삶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공로나 의를 드러내는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고 곳곳에서 불협화음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혼적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를 강하게 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말씀으로 자신의 죄를 씻는 영혼은 혼에 갇혀 있는 영이 해방이 됩니다. 영이 혼에서 해방될 때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은 영이 살아나서 혼에서 해방 될 때 자신의 행동이 혼적 삶인지, 영적 삶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에서 해방 되어 영적 삶을 사는 영혼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화목 제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군대 가기 전 광산에 다니는 기간 동안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탄광의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면은 내 처지가 처량하여 눈물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찬송을 하면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에 피 밖에 없네” 라는 찬송을 부르며 씻었습니다. 탄가루에 묻은 복장을 가방에 담고 집에 돌아오다 대학 다니는 친구를 보면은 열등감이 밀려와서 피하여 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교회를 들려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옵소서.” 그 때가 주님과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 첫 사랑 때 죽은 영이 살아나서 혼으로부터 행방되는 시기였습니다. 영이 해방되자 영적인 행동과 혼적인 행동이 구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죽은 말씀으로 대하는 신앙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적인 의지로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 자기만족은 추구하지만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영이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하여 살아나서 혼으로부터 해방될 때 죄를 멀리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I commit my life to Your hands: I offer it all now to you. With all the affection of my heart and my soul, because, O Lord, I love You-I abandon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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