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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이사야 55장 1-3절/ 9월 2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09-27 추천 0 댓글 0 조회 940

2010년 9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설교 본문 : 이사야 55장 1-3절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0. 들어가는 글

한국의 명절은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만남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고향에 방문하여 소중한 만남들을 가지며 가족들의 정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가 있다면 소중한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지난 달 묻지마 살인이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강도강간 협의로 14년 동안 복역하다 지난 5월에 출소한 윤씨가 기술교육까지 받았지만 전과자인 그를 받아주는 곧은 없었습니다. 범행한 당일도 인력 시장에서 오전 6시부터 일감을 구했으며, 저녁 일감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일이 없었습니다. 윤씨는 낙담을 하고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근처 놀이터로 갔고 술병을 다 비워갈 무렵 맞은편 건물의 옥탑 방에서 TV 오락프로그램을 보던 한 가족의 단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윤씨는 순간적으로 분노한 나머지 곧바로 계단을 올라가 자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임모(42)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고 임씨 부인 장모(42)씨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쳐 큰 상처를 입히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왜 옥탑 방이 범죄의 대상이 되었는지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중상을 입은 어머니와 두 자녀는 당시에 받는 충격을 어떻게 이겨내며 이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또한 전과자들의 사회적응과 안전망 구축은 참으로 시급하며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받은 가정을 위로해 주며 전과자들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해결책은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갈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갈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수고를 하고 있다.

이사야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고 합니다. 그리고 2절 말씀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합니다. 저는 이 두 구절을 연결시켜서 단순하게 말씀을 묵상 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물은 생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받아드리면 영원한 생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영원한 생명의 물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 많은 물질과 수고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은 가장 귀한 축복을 받은 인생들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수고를 허비하지 아니하고 영생의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중한 은혜를 너무나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며, 알고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고향에 방문하여 고향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후배 집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향 교회가 땅을 사고 성전 건축을 준비한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고향 교회 출신 목회자들에게 성전 건축 후원을 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제 답변은 우리 교회 코가 석자라서 힘들다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향 교회에 대한 섭섭함이었습니다. 고향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청년시절에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신학을 하면서 고향교회로부터 장학금은 고사하고 도서비 한 번도 지원 받지 못한 것이 섭섭함으로 남아 있었나 봅니다. 아니 고향교회로부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것이 마음에 더 큰 상처로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고향에서 올라온 이후에 그런 상처가 남아있는 것이 주님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고향 교회로부터 저는 가장 귀한 영생의 물을 받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제 마음에는 작은 값을 따지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까지도 용서하면서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고향 교회를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신학을 한 것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만든 주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저처럼 값없이 주신 영생의 물에 대한 감사가 부족하면은 작은 값에 연연하여 섭섭함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주님이 값없이 주신 영생의 물을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값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하는 일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앞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앞서면 거기서부터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을 하면서 상처를 받는 경우는 일의 무개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목회가 더 힘들게 느껴지면 거기서부터 시험이 찾아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의 헌신이 다림줄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일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키우든지 아니면 주님의 사랑의 크기보다도 우리의 일을 줄여야 합니다. 드보라의 승전 노래 중에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합니다(삿5:9). 자신들의 헌신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즐거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면 즐거운 주일이 됩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것도 힘들게 느껴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한 헌신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 커야만 더 즐거운 헌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감당할 수 있는 헌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3. 물보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은 누구나 와서 값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우리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향 교회를 제가 바라보는 시각도 가장 소중한 물을 얻었으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열심히 묵상한 성도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물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젓도 값없이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주와 젓도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포도주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사함을 의미하며, 젓은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물과 포도주와 젖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이미 주신 축복을 넘어선 탐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물을 통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탐심을 축복인 냥 구하다 보면 오히려 가지고 있는 영생의 물이 고갈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생의 물보다 더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보다 부유해지고, 건강히 편히 살며, 가족들이 잘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수준이 있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잘되어서 헌금 많이 드리고, 구제 많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구하는 수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막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울창한 야자수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당 한복판에는 작은 샘이 있었습니다. 사막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이곳에 들러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나무 그늘에서 피로를 풀었습니다. 노인은 나그네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사막 한가운데 울창한 야자수 숲과 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가끔 나그네들이 감사의 표시로 동전을 건네주었습니다. 노인의 금고에 돈이 조금씩 쌓여가자 “금고에 동전이 가득 차면, 그 돈으로 넓고 큰 집을 지어서, 이 지긋지긋한 사막을 떠나리라”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노인은 나그네들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는 나그네들은 더 이상 노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물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마구 낭비하자 샘물이 점점 말라갔습니다. 노인은 조금만 물을 더 팔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욕심에 야자수가 샘물을 흡수한다고 생각하며 야자수를 모두 베어냈습니다. 사막에는 야자수의 시원한 그늘이 사라졌고 샘물도 곧 말라 버렸습니다. 나그네들은 더 이상 찾지 않았고, 노인도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습니다. 과욕이 불러온 비극이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합니다(약1:15). 주님이 이미 값없이 영생의 물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노인처럼 과욕을 부리다 주님이 주신 영생의 물마저 잃어버리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부리는 과욕을 주님께 당연히 받아야 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노인이 과욕만 부리지 많았다면 주님의 주신 샘물을 통하여 가장 귀한 축복과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물보다도 그 이상의 탐심으로 인하여 주어진 물까지 고갈되지 않은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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