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룩을 주의하라!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6장 1-12절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0. 들어가는 글
요즈음 이슬람이라는 이슈가 세상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9.11 이슬람 테러 9주년 기념일을 맞아 어떤 이가 꾸란을 소각하는 행사를 하겠다는 것에 대한 찬반 여론이 분분했습니다. 결국 그는 꾸란을 태우지 않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을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다고 곳곳에서 성난 무리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꾸란을 태우겠다는 말 한마디가 이슬람권 선교에 먹구름이 끼었으며,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느끼는 문제는 명분을 제공한 사람은 질타를 당하고 있지만 과격한 무슬림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명분을 제공한 사람보다도 오히려 테러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있는 이슬람의 폭력성을 더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합니다(11절). 꾸란 소각 문제를 보면서도 무엇이 주님 안에서 옳고 그른지 참으로 분별하기 힘든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금 시대의 누룩이 무엇인지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누룩은 사람의 계명이다.
오늘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누룩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을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합니다(마13:33). 여기서는 누룩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란 12절을 보면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를 가리켜 '사람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계명이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낸 교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을 왜 주의하라고 합니까? 본래의 의도와 빗나가서 하나님보다도 자신들이 더 부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금식했다는 행위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명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이 금식했다는 행위를 더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심하라고 이르신 '사람의 계명'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요즘 많은 교회가 유행처럼 받아들인 '긍정의 삶'도 누룩에 해당합니다. 무조건적으로 긍정 자체를 누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긍정의 대상에 대하여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서는 무한 신뢰로 긍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 학벌, 사회적 배경과 같은 세상이 중요시하는 것들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런 무관심은 바울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을 분별하기 힘든 혼동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계명'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지만 틀릴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주의에 빠진 누룩 신앙은 소수에 복 받은 사람을 앞세워 간증까지 시켜가며 '누룩'의 정당성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소위 세상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며 하나님보다도 자신들의 성공을 더 내세우고 있습니다.
2. 누룩은 전염성이 강하다.
누룩의 성격은 단시간에 빨리 퍼지는 데에 있습니다. 누룩이 빨리 퍼지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누룩의 전염성이 대단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갑작스러운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전국에서 목회자들이 모여듭니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적용하여 성장시켜야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 성장 세미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뜻은 교회를 성장시켜서 유명세를 타는 것보다 겸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자세가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소유주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묵묵히 감당을 하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소유주가 되면은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하여도 자신의 영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종이냐? 소유주이냐?” 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소유자가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사역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치열한 영적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능력의 종이 나타나서 은사집회를 한다고 하면 지금도 많은 성도님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듭니다. 그리고 더 많은 축복을 받겠다는 욕심에 서로를 밀치기까지 하면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추구하는 누룩 신앙이라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건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3. 누룩이 아닌 순수 말씀으로 나아가라.
이제 어떻게 하면 '누룩'없는 자로서 살 수 있습니까? 누룩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에서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누룩 없는 떡인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누룩이 있는 유교병은 달콤함과 부드러워 그것을 맛 본 자는 다음부터 쉽게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퍼석 퍼석하고 딱딱한 누룩 없는 무교병은 사람이 먹기가 힘들어서 고난의 떡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누룩이 있는 유교병이 아닌 누룩 없는 무교병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깊이 묵상한 말씀은 하나님이 ‘왜 유대인들을 대할 때 그토록 엄격하셨을까?’ 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참으로 관대하셨습니다. 제가 묵상한 은혜는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은 자녀들을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더 엄격한 기준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기에 지금 시대에도 이 기준이 동일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먼저 말씀을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엄한 말씀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의 이런 기준과 다르게 이방인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서슴없이 정죄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인들에 대하여서는 혹시 교회를 떠날까 염려하여 죄를 눈감아 주면서 관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조롱과 비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술과 담배에 대해서는 얼마나 심하게 정죄를 합니까? 술과 담배를 하면은 지옥의 자식들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추행을 하고, 교회 중직들이 세상의 비리에 휘말려도 정직한 회개 없이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마하며 넘어갑니다. 어느 것이 주님 앞에서 더 큰 죄입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대로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낸다”는 죄악을 현대 교회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좇고, 육신에 속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오직 잘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사람의 계명인 누룩에 오염된 자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세상의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룩이 없는 순전한 말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여 축복처럼 느껴졌던 달콤하고 부드러운 누룩을 제거하시고자 합니다. 그리고 퍼석 퍼석하고 딱딱한 누룩 없는 무교병을 맛보시게 하면서 고난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 결과로 달콤한 누룩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누룩이 없는 딱딱한 말씀이 우리의 생명을 살린다는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누룩을 축복이라고 그리워하는 신앙이 아니라 딱딱하고 누룩이 없는 순수한 말씀이 힘들어도 생명의 떡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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