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는 은혜
설교 본문 : 전도서 3장 14-19절
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70대 아내가 56년 동안 동고동락한 80대의 남편을 살해하였습니다. 난치성 질환인 버거씨병을 앓고 있던 남편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퇴원한 일을 놓고 티격태격하였습니다. 아내가 병원에 가서 치유할 것을 권하자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주먹으로 심하게 때렸습니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자 아내는 땔감 창고에 있는 각목을 가져와 남편의 몸을 수차례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쓰러졌고 가슴쪽 과다 출혈로 그대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경찰조사에서 할머니인 그녀의 첫 진술은 "내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맞고 살았는데…"였다고 합니다. 노년 부부의 56년 동안의 삶은 가부장의 폭압과 아내의 숨죽임으로 이어져온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폭압에 숨죽여온 아내의 분노 폭발로 인하여 너무나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CCM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서 말씀을 통하여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육신의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
솔로몬의 지혜와 부는 열방을 놀라게 하였고 열왕들은 부러움으로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떠났고 많은 이방신들을 끌어드렸습니다(왕상11:9). 본문 말씀은 솔로몬이 일평생 지내오면서 얻은 결론적인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18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가장 큰 지혜와 부를 누렸던 솔로몬이 인생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린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이 했던 위대한 업적들을 떠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이루었던 수많은 건축사업과 그가 남겼던 수많은 지혜로운 잠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우지 아니하고 자신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 깨달았다고 합니다. 과연 그의 고백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잔느 귀용은 사람이 육신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누린 후에 결론적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그 타이밍이 늦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 타이밍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참으로 깨닫는 타이밍이 적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10년이 넘도록 도피생활을 하였습니다. 도피 생활 속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블레셋으로 도피하여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적까지 하였습니다(삼상21:13). 다윗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되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인물들은 모든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먼저 깨닫는 영혼들이었습니다. 요셉도 사랑받은 아들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부족에서 지하 감옥의 죄수로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감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신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까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힘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면 형들에게 복수하였을 것입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만 부족하여 사자굴 속의 더 밑바닥까지 내려감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밑바닥 속에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심으로 인하여 밑바닥까지 내리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적으로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밑바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만 매달리는 것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우선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기에 가장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힘과 노력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기도를 하면서 흐느껴 운 적이 있습니다. 집에 왔는데 아내가 한마디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울면 듣는 성도들이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흐느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직까지도 당신 목소리를 모르느냐?”, “당신 목소리는 작아도 본당 뒤편까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제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흐느낀 이유는 제 설교가 “성도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도 변화되기 어려운데 성도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많은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여 잘 선포하면은 성도들이 변화될 줄 알았습니다. 그럴수록 설교하는 제 마음은 부담감과 함께 지쳐갔습니다. 기대하는 만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험 드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가끔 성도님들이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하지만 삶의 변화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그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를 준비하는데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끙끙되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민하는 동안 주님은 청중들의 허물을 보며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기 위해 설교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저의 변화를 원하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할 존재이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하나님이 친히 주관자가 되어서 각자의 영혼들을 삶의 자리에서 변화시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은혜
우리가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은 우리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리하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 등으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감춥니다. 우리는 체면 때문에 행동을 바꾸고, 남이 볼까봐 생각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내려 가면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옵니다. 저의 밑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근접한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설교할 때의 모습이 아니라 성도들과 축구할 때의 모습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처음 축구를 할 때 저의 와일드하고 승부욕이 강한 모습에 성도님들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지금은 축구하는 모습이 조금은 온순해졌다고 듣습니다. 저의 모습이 조금 변한 것은 성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목사로서 성도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처음 축구할 때는 잠시 목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극한 상항에 직면하면은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려운 상항에 직면할 때 자신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친히 해결해줌에도 불구하고 항상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에 반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가 붙잡혀 심하게 곤장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추운 지하 감방에 갇혀서 다음날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장 처참한 밑바닥에서 나온 진심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밑바닥에서 주님을 가장 의지함으로 옥문을 흔들어 열리게 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가장 밑바닥으로 내리신 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청년시절에 광산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일이 서툴러서 오른손 손가락 세 개의 인대가 끊어졌습니다. 피가 솟구치는데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결국은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제가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의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목회를 하다가 힘들 때면 크나큰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으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밑바닥을 경험해서라도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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