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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주님!/ 마태복음 24장 40-42절/ 11월 28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0-12-01 추천 0 댓글 0 조회 364

2010년 11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중심을 보시는 주님!

설교 말씀 : 마태복음 24장 40-42절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북한의 연평도 폭격으로 인하여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한국에서 G20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북한이 도발이 있을까봐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G20이 성공적으로 끝난 이후에 북한의 도발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반도에 평화의 보장없이 어떠한 번영도 이루기가 힘들다는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이 반응입니다. 여야 정치권은 북한의 도발에 대하여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책임 공방을 돌리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또한 젊은 세대는 이번 북한의 도발에 대하여 인터넷의 전쟁게임 정도로 생각하며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포격을 맞은 연평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트라우마라는 상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보면서 가장 넓은 제국을 이루었던 칭기즈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냥 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얼마든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함께 꿈을 꾼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평도 폭격 사건이후에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함께 꾸는 것입니다. 연평도 주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서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꿈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연평도의 평화는 이 땅 전체의 평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온 국민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충분히 하나님의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칭기즈칸은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신앙생활에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공간인가, 중심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마지막 날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깊은 묵상을 하면은 더 소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두 남자는 같은 밭, 즉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남자는 데려가고, 한 남자는 버려두었습니다. 또한 두 여인도 같은 공간에서 맷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여인은 데려가고, 한 여인은 버려두었습니다. 겉으로는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는 그들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중심이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비유로 설명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철도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부산까지 가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중심은 각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의 중심은 각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느냐?, 버려두느냐?”는 예배드리는 공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중심으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였지만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공간 안에 함께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공간 안에서 가인과 아벨처럼 우리의 중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데려감과 버려둠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내용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노년에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중심에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에 대해 참 좋은 책을 썼구나. 너는 나에게서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이에 대해 아퀴나스의 대답은
“주여, 오직 예수님만을!" 이라는 단한 줄의 대답이었습니다. 어떤 사제나 학자보다도 하나님과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지만 그는 하나님께 중심을 가장 잘 드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올 한해 나름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충성하며 섬겼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올해 주님께 충성을 참 잘했구나. 너에게 어떻게 보답해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도 아퀴나스 대답처럼 “주여, 오직 예수님만을!" 이라고 중심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한 일에 대한 어떠한 보상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드리는 자녀들이 주님께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2. 중심을 두는 문제가 필연인가? 선택인가?

이제는 한 인간의 중심의 문제가 어쩔 수 없는 필연인지, 선택인지에 대하여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에 대하여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은 아브라함과 룻이 갈라지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룻에게 먼저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룻은 눈에 보기 좋은 음란의 도시 소돔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선택 속에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는 하소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돔의 환경이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이 소돔이라는 성을 선택하였기에 그런 환경의 영향을 가족들이 받아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지만 가나안 땅에서 살아생전 땅을 한 평도 소유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자신의 무덤하나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룻의 결말이 어쩔 수 없는 필연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됨을 보여줍니다.


개척하여 8년차를 보내고 있습니다. 연말이면 늘 무거운 짐에 짓눌립니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다음년도 일꾼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성도수가 많아지면 조금은 쉬어질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일이 더 많아져 무개감이 가중되는 느낌입니다. 매년 겪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제가 개척교회를 사모하여 선택한 일입니다. 결국은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상황이 힘들다고 제 중심이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처럼 현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동일합니다. 지금의 현실이 무척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작년에 비하여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어려워진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자신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한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누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전에 참으로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재벌 총수 부친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의 목을 절단한 뒤 그것을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 8억원을 요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일부 절단하여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자라면 그는 얼마나 치졸한 인간입니까. 이 일을 함께 저지른 공범이 하소연 합니다. “친구가 범죄하는 일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해서 응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범죄를 통하여 자신도 돈을 벌겠다고 마음이 움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악가운데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 안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주님 안에서 너무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교를 하는 바울에게도 필요한 사람이었고, 빌립보 교회에서도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보면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함께 수고하는 삶으로 나타났기에 주님께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향하는 마음이 함께 수고하는 삶으로 나타나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스페인 화가 오야의 작품 중에 이빨 사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수형으로 사형 당하는 시체의 입으로부터 무서움에 떨며 치아를 뽑아내려는 그림입니다. 왜 그 여인은 무서움에 떨면서도 한낱 시체의 치아를 뽑으려고 합니까? 고야가 살던 18세기의 스페인에 사형 당한 시체의 치아엔 신통한 힘이 있어 그것을 지닌 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야는 미신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망하기 위함입니다.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로서 예배와 기도드리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실생활은 단판이었습니다. 죽어있는 시체의 이빨만 뽑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미신처럼 죽어있는 믿음을 가지고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그들의 중심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중심이 죽어있는 믿음으로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있다면 시체의 이빨을 뽑고 있는 그림속의 여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우리 중심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죽어있는 믿음으로 예배의 공간에, 기도의 공간에, 찬양의 공간에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데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중심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서 함께 수고함으로 주님이 언제든지 우리를 데려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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