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설교 제목 : 별을 보고 기뻐함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장 1-12절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0. 들어가는 글
분단된 조국에서 전후 세대로 태어나 지난주만큼 전쟁의 위기의식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이 민족 위에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미국 선교사 리처드슨 부부가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하였습니다. 자바 섬에 살고 있는 식인종들은 부족 간의 싸움들을 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족 간에 싸우다가 화해를 청할 때는 갓난아기를 상대편에게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자바 섬에 도착한지 2년째 되던 해, 큰 부족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화해의 기운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인 부부가 아기를 안고 언덕에 나타났습니다. 대치하고 있던 양편의 부족이 놀라움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는 한 살 난 자신의 아들을 평화의 아기로 내놓은 것입니다. 말없이 바라보던 양쪽 진영은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바치는 백인 부부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자바 섬의 식인종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남과 북의 대립 속에서 평화의 아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민족의 화해를 가져 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는 말씀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 속에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을 따라온 여정 없이는 수박 겉핥기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동방 박사들의 여정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실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까지 도달 할 수 있는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뜻 깊은 성탄절에 동방 박사의 여정을 통하여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오신 이유?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 시기가 “헤롯 왕 때에”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1절).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던 시기임을 밝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가장 악한 왕이 통치하고 있는 시대에 역사 안으로 들어 오셨을까요?” 그만큼 어두운 시기에 이 땅에 오셨기에 주님이 밝히신 빛이 더 찬란히 빛났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에 대해서도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히 증거합니다(1절). 구약 성경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은 유대 고울 중에서 가장 작은 동네였지만 아기 예수가 탄생함으로 온 인류의 구원과 소망의 장소가 되었습니다(6절). 이처럼 우리도 가장 작은 존재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가장 소중하며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왜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왔느냐?” 라는 문제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 고고학자들이 “동방”의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이스라엘 동쪽 지역인 바벨론 이라는데 거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벨론은 구약에서 유다가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장소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들이 스룹바벨 시대에 다시 돌아왔지만 실제로 돌아온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정착하여 유대인의 공동체인 회당을 짓고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 땅에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동방 박사들은 이들을 통하여 메시야 대망 사상을 듣고 기다려 온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인 자신들에게 메시아 별이 발견되자 별을 따라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모든 삶을 내려놓고 오직 별 하나를 의지하여 위험한 길을 따라서 유대 땅까지 온 것입니다(2절). 저는 동방 박사들이 별 하나 의지하고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도전은 불확실한 도전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도전이기에 포기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들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경배와 저주, 영광과 핍박이 공존하였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었지만 헤롯 왕의 어린아이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에는 항상 두 가지 반응이 대치하였습니다. 명성과 긴장입니다. 명성은 군중, 곧 무리와 관계되고 긴장은 예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과 연관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긴장도 커졌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가장 높아진 때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러서 급기야는 예수와 긴장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체포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예수를 적대시하는 집단이 충돌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명성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때 무리가 예수를 칭송한 것이 허구임이 드러났습니다. 무리는 돌변하여 적대자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이 걷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홀로 걸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걸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길에서 제자들조차도 동반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절하게 홀로 걸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동반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동반자가 있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가장 귀한 믿음은 그분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반자가 되는 일에 실패를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이 성공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히 낮아져서 섬김의 삶을 살 때 그분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잘해서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보다 겸손히 예수님의 동반자가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3. 동방 박사들의 실패와 회복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에게도 실패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에 이르러서 더 이상 별의 인도를 받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났으리라는 그들의 생각과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3절). 그 후유증으로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갓난아기를 다 죽이는 불행한 결과만 초래했을 뿐입니다(16절).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다가도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이 앞서면 많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혼란스럽다면 혹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이나 생각이 앞서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삶이 혼란스러울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의 판단이나 생각을 포기하고 다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면은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고 합니다.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접었을 때 그들을 인도했던 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앞길이 막혀있다면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가득차서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포기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을 접으면 주님 인도하시는 길이 보인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11절 말씀에서 “엎드려 아기께 경배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엎드리다” 는 무능해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동방박사의 자세는 자신을 무능한 존재로 여기며 겸손히 낮춤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경배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수록 똑똑해지는 사람보다 무능해지는 사람이 주님의 온전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경험이 쌓이고 자신감이 생겨야 하는데 더 어렵게 느껴지면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최근 들어 참으로 무능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에 짓눌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엎드린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가 무능하다고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구나!” 였습니다. 무능할지라도 오히려 주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주님께 인도를 받을 수 있으며, 엎드려 경배를 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동방 박사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버리고 오직 메시야의 별의 인도함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예수님의 인도하심만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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