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자!
설교 본문 : 로마서 15:1-7절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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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터기의 TV 화면은 리비아 사태에 대한 보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아랍권의 민주화 바람이 도미노 현상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아람권의 민주화 바람이 “과연 북한까지 불어올 수 있을까?” 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만 김정일 정권은 긴장과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최근 평안북도 정주와 용천에서 주민들이 전기와 쌀을 달라고 외쳤고, 후방 군부대에서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했습니다. 신의주에서는 장마당 상인들이 단속에 맞서 시위를 벌였고 보위부와 군대가 나서 진압했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악질 보안서장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시민혁명이 전개된 시기에 들려온 소식들입니다.
북한 주민의 최근 반발을 정치적 의미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생계형 시위로 볼 것인지는 전문가들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국경 지역의 통신을 통해 아랍권 혁명의 진실이 알려지고 주민을 굶기는 김정일 체제가 허점을 드러낼 때면 주민 봉기도 가능하다는 낙관론도 있습니다. 반면에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소셜네트워크가 불가능하고, 이동수단도 제한돼 주민의 결집이 어렵다는 비관론의 견해가 더 우세합니다. 그러나 정교한 예측마저도 빗나가는 마당에 외부에서 북한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봉건왕조 시대로 역행하는 북한일지라도 내부모순이 극한에 이르고, 외부의 변화소식이 가랑비처럼 주민들 마음을 적시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의 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이 북한 주민들의 연약한 점을 담당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2주 동안 사도 바울이 선교했던 발자취를 밟으면서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다시 한 번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돌아와서 기도할 때 저는 흐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실 앞에서 저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저는 연약하지만 제가 의지하는 주님이 위대하신 일들을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주셨듯이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해 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약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5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1절).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신이 약한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약한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담당한다는 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흠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베이유는 중력과 은혜라는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중력으로 한 물체는 그 자체 속으로 우주를 점점 더 흡수함으로써 계속 몸집 불리기 위해 다른 불체들을 끌어당깁니다. 인간 내부에도 이와 똑같은 중력의 힘이 작용합니다. 인간도 확장하고 획득하여 자신에 대한 중요성을 키우려 합니다. 베이유의 결론은 “영혼의 모든 자연적인 움직임은 물리적 중력의 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은혜만이 유일한 예외다.” 라고 합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사랑이라는 중력 반경에 묶여 있어 “은혜가 지나갈 통로를 막아 버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죄인으로서 자신을 보기 시작할 때 곧 영적 중력의 힘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은혜를 찾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놀랍게도 약하고 흠투성인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중력의 법칙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은 바리새인의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력의 법칙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죄인들과 다르다고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칙에 사로잡힌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법칙은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용서하는 은혜의 법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2.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이기적인 중력의 법칙에 사로잡혀 영광을 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5,6절).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의 법칙으로 들어 갈 때 가능합니다. 은혜의 법칙은 예수님이 죄인 된 인간의 약점을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은혜의 법칙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법칙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한 인간의 망가진 모습을 바라보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사랑스러웠던 소중한 존재의 모습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영화 “질긴 잡초”에 보면 두 사람이 길을 가다 술에 취한 채 눈밭에 누워 있는 늙은 에스키모 여자를 우연히 발견합니다. 두 사람이 여자를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술에 취했나, 아니면 부랑자인가?” 묻습니다. “부랑자예요. 평생 그랬죠. 그 전에는?” “알래스카 창녀였고요.” “평생 창녀는 아니었겠지. 그 전에는?” “몰라요. 어린애였겠죠.” “어린애라면 대단한 거지. 부랑자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지. 대단한 거야. 안으로 데려갑시다.” 두 사람은 에스키모 여인을 은혜의 렌즈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랑자요, 창녀에 지나지 않던 여자지만 은혜의 눈으로 보면 망가진 형상일망정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현재의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주셨듯이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관계의 어려움입니다. 교인들 간에 상처를 받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회복하기 힘들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는 서로의 약함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서로의 약함 때문에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생긴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느라 극복해야 하는 장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이 땅에 오실 때 극복하신 장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지성소에 거하시던 분으로 그분이 임재하시면 산 꼭대기가 화염에 휩싸였고, 부정한 자가 함부로 접근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7절 말씀을 보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고 합니다. 우리가 약함 때문에 관계의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예수님 죄인 된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의 법칙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은 의인보다 죄인을 가까이 하십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외관상 신앙이 좋은 이들을 말합니다. 진정한 의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어느 강사가 영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줄에 매달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줄이 끓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시고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계속 줄을 끊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묶어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자칭 의인들은 하나님과 줄이 끊어진 줄을 모르며 추락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줄이 끊어진 줄 알았을 때 주님이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심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은혜가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어느 신사가 식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사는 나가면서 팁을 놓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꾸어, 10달러의 팁을 놓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종업원이 따라 나왔습니다. “손님, 팁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이 받을 자격이 없는데요.” 그때 그 신사는 “아니오. 오늘 당신의 모습에서 무슨 사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업원이 “저는 어젯밤에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습니다. 오늘 이 일을 끝내고 저는 죽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오늘 손님께서 주신 이 팁은 팁이 아니라 제게는 희망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신사는 종업원과의 관계에서 불친절에 대한 반응을 상대방의 약점으로 받아들이고 작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살 수 있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길 기대해 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약한 자임을 깨닫고, 이기적인 중력의 법칙에서 은혜의 법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은혜의 법칙은 현재의 망가지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약함을 받아주신 것처럼 서로의 약함을 받아 주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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