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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 마태복음 4장 18-25절/ 3월 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03-07 추천 0 댓글 0 조회 629

2011년 3월 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사람 낚는 어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4장 18-25절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0. 들어가는 글

요사이 이른바 '이슬람 채권법(수쿠크)' 도입을 둘러싸고 정부와 보수 개신교계 사이에 묘한 긴장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슬람 체권법은 현물을 주고받지 않는 거래에서는 이자를 금한다는 코란경을 근거로 특정 사업에 투자하는 채권에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체권법은 구약성경 신명기에 나오는 제도입니다(신23:19). 신명기의 율법을 코란경에 삽입한 이슬람이 그 법을 돈을 거래하는 나라들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을 가지고 있는 아랍 국가들이 경제 정의를 실천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있습니까? 수쿠크 법을 통하여 감면된 세금이 누구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까? 약자 보호법을 통하여 오히려 아랍의 왕족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함으로 아랍 국가들의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아랍의 민주화 현상은 왕족들의 막대한 부의 축적으로 인하여 빈부 격차가 심해짐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랍에서도 수쿠크법은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만 지킬 뿐이고 일반사람들은 이자를 주고받습니다. 일단 이슬람 금융을 이용하게 되면 샤리아(율법) 위원회의 감독을 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금융 분쟁시 이슬람 법원 설립을 허락해서 판결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무슬림들조차 원리주의자들 외에는 지키지 않는 위험한 법을 왜 우리가 국법을 바꿔가며 특혜를 주면서까지 지켜야 합니까? 저는 이 땅이 이슬람 율법에 의해 지배받는 나라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을 따르는 영혼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신앙의 본질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입니다(19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람 낚는 어부”에 대한 사명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들을 망각하게 만들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주변 것들에 끌려 다니는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치면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성지 순례를 다니면서 왜 교회당 안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성화들을 많이 그려 놓았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성화들이 많이 손상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이교도들이 성화를 파괴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화들을 파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성화의 그림 조각을 가지고 있으면 악귀가 물러가고 또한 성화 조각을 갈아서 마시면 병이 낳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성화를 떼어 갔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은 성화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기복적인 신앙들이 유행할 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슬람 세력에 점령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무력으로 개종을 시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개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을 믿으면 세금을 감면해 주고 기독교인들은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금을 감면을 받기 위해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다 실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숫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제가 지난주 새벽에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멈추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단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다고 20절과 22절과 25절에서 세 차례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외적으로는 예수님처럼 죽어가는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지 순례 기간 참으로 성령 충만 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오직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헌신을 새롭게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금요일 저녁 피곤한 몸으로 급한 메일이 있을까 하여 확인하면서 그 충만했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많은 메일 중에 한 통의 메일 안에 한 가정이 한신교회를 떠나 원래 다녔던 교회를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믿었던 성도가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마음이 상하여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밤새도록 기도하며 구하였습니다. 주일을 모내고 월요일 날 전화심방을 하면서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김포로 이사를 와서 우리 교회 등록했던 권사님이 몇 달이 못 되어 서울에 있는 원래의 교회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더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마리의 숫자를 남겨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도님들은 우리교회가 수적인 성장에 욕심이 있는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이야기를 개척 초창기부터 들었습니다. 다른 교회로 옮기는 성도님들에게 찾아가서 매달리지 않았거든요. 성도님들이 찾아와서 교회를 옮기는 영혼에게 매달려 보려고 하여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교회 다니든 저 교회 다니든 상관이 없거든요. 그러나 교회를 떠난 영혼들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그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개척하는 교회 창립 예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개척을 먼저 한 선배목사님이 축사를 하였습니다. 먼저 개척한 목사님이 몇 년 동안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조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장에 대해서 마음을 비우자 목회가 편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절반은 동의하지만 절반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수적인 성장에 대해서 욕심은 내려놓고자 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추수하는 그 열정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이 생명을 마치는 날까지 주님께서 저에게 부여한 사명입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길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24절 말씀에서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4절의 예수님의 능력이 25절에서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르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감동적인 글입니다. 이스라엘에 네 개의 한인 교회가 있습니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세 개,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에 하나있습니다. 오늘날 ‘땅 끝’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에 한인들의 기독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텔아비브 교회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네 시간 걸려서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더 늦은 시간에 일곱 시간 걸려서 한 청년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들을 맞는 교회는 감격이 흐른다고 합니다. 돌아갈 차편이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를 찾아와서 그곳을 지키며 생명의 중심을 향해 외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텔아비브 교회의 어느 아침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에어컨이 고장 나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연히 찬양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갔습니다. 찬양을 하는 중에 외국인 부부가 조심스럽게 예배실로 들어왔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 하네’. 바로 그 찬양이었습니다. 교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외국인 부인이 계속해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가사는 못 알아들어도 멜로디야 같은 거니까 무슨 스토리가 있는가 보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자신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포르투갈에서 온 부부입니다. 지나가다 찬양에 이끌려 예배당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프리카 선교사였는데, 이 찬송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 때 불렀던 노래입니다.” 딸은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했고, 교우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가졌던 헌신과 영혼사랑의 열정이 그들 후세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대중교통이 없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매주 일곱 시간씩 걸려서 교회를 찾아와 하나님을 사모하여 예배를 드리는 한 영혼의 가치를 “어찌 숫자가 몇 명 예배를 드렸느냐”로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숫자에 매이지 아니하고 한 영혼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도중 에어컨이 고장 나는 불편함속에서 문을 열고 찬양을 부르는 도중 아프리카 선교사의 딸 부부를 교회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받으시면서도 교회 밖에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신교회 119운동은 교회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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