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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냐? 죄인이냐?/ 요한복음 8장 1-11절/ 3월 13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03-15 추천 0 댓글 0 조회 404

2011년 3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의인이냐? 죄인이냐?

설교 본문 : 요한복음 8장 1-11절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에 가슴 아픈 기사 내용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씨는 어머니가 자신이 6살 때 의붓아버지 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나갔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졌습니다. 어머니가 가출한 뒤 이씨의 친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불러들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이씨가 11살 때에 자살했습니다. 새어머니는 이씨와 남동생을 부산의 한 소년의 집에 보내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는 16살 때 소년의 집에서 도망 나왔습니다. 이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소년의 집에서 나온 동생을 만나 서울에서 전세 오백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지냈습니다. 이씨는 최근 몇 년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동생이 공장 일을 하며 번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습니다. 이씨는 자신의 불행이 어머니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이 힘들어질수록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더욱 깊어갔습니다. 결국 이씨는 둘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이씨는 경찰서에 찾아와 “어머니를 살해했다”며 “복수를 마쳤으니 이제 죄 값을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경찰조사에서 이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렸을 적 어머니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뒤 충격을 받아 이성교제도 해본 적이 없다”며 “살해한 건 죄송하지만 나도 피해자”라고 말했습니다.


신문 기사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누가 가해자이며 피해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어머니입니까? 아내가 집을 나가자 알코올 중독으로 지내다 자살한 아버지입니까? 어린 두 자녀를 소년의 집에 버리고 사라져 버린 새어머니입니까? 유부녀와 눈이 맞아 한 가정을 파괴하고 살아온 의붓아버지입니까?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상처 때문에 29년 만에 찾아가서 복수한 아들입니까? 이들은 모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경우가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율법으로 재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용서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태도를 따를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의인이냐? 죄인이냐?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5절).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돌로 치지 못하게 하면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고,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이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어 곤경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과 음행한 여인과의 관계를 의인과 죄인의 구조로 바라보았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이 의인이 되어 음행으로 율법을 어긴 죄인에 대하여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간음한 여인을 통하여 의인과 죄인에 대하여 구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합니다(7절).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하여 의인과 죄인의 구조는 깨뜨리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이 이 답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 현장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9절). 예수님은 이 답변을 통하여 통념처럼 죄인과 의인이 아니라 두 종류의 죄인으로 나눕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과 인정하지 않는 죄인의 새로운 관계 설정입니다. 바리새인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었고, 간음한 여인은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두부류로 구분될 뿐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 것이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중독자자 클리닉에서 “전에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치료되었습니다.” 라는 말은 위험하다고 합니다. 한번 알콜 중독자였던 사람은 설사 10년간 술을 입에 대지 않았어도 여전히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로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부인할 때 다시 중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인줄 알고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보다 죄인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더 큰 죄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괜찮은 죄와 불가한 죄

현재의 교인들이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하면서도 정말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나름대로 괜찮은 죄와 불가한 죄로 구분을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괜찮은 죄가 되어 악독한 죄만 피하면 그런대로 영적 상태에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준을 가지고 불가한 죄로 정죄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괜찮은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의인인 냥 행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은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조항들을 만들어 놓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우리들 모습 속에도 자신과 관련된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괜찮은 죄이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불가한 죄로 바라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주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내려오다 우리 교회 남자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그 성도님은 신앙의 년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에게 너무나 감동적이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교회를 찾아온 사람에 대하여 문제점을 들추기 보다는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어떤 목사님의 말씀보다 그 한마디가 은혜가 되어서 새벽설교와 여신도 연합 월례회서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죄인들이 찾아옵니다. 문제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문제점을 들추어내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찾아온 영혼을 어떻게 도와줄까 고민할 때 그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제자훈련을 시작하면서 나눈 간증들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남자 집사님이 오전 제자반에 참석하여 젊은 시절 오대양 육대주를 좋아하며 살다가 사업이 실패하여 너무 힘들다 보니 자살까지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베푼 사랑의 손길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큰 등치에 눈물을 글썽이며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그 집사님에 문제점을 들추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도와주었기에 그 가정이 구원을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문제점을 들추어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그는 인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관계에 따라서 문제점을 들추어 불가한 죄로 몰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괜찮은 죄와 불가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더 중요시 하였습니다.

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 시킬 수 있습니다. 신약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용서라는 헬라어 단어는 “자신을 풀어주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나는 과거의 감옥에 갇히며 변화의 잠재력은 완전히 차단됩니다. 용서는 과거를 풀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과거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시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1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거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시고 죄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 생물학자 윌슨이 실시한 개미실험입니다. 개미집 안에 한 개미가 죽어 있어도 다른 개미들이 그것을 아는 데는 며칠씩 걸립니다. 이 같은 관찰로 개미는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죽음을 감지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개미가 썩기 시작하면 다른 개미들은 예외없이 시체를 집밖 쓰레기 더미로 끌어냅니다. 윌슨은 반복 실험 끝에 그 화학물질이 올레산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개미들은 올레산 냄새만 맡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냈지만 다른 냄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본능이 어찌나 강하던지 종이 조각에 올레산을 묻혀 놓아도 개미들은 어김없이 종이를 개미무덤에 끌어냅니다. 끝으로 윌슨은 살아있는 개미 몇 마리에 올레산을 묻혀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살아있는 개미들이 다리와 촉수를 비틀며 버티는데도 동료개미들은 무조건 개미무덤으로 밀어냅니다.


이 실험이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들이 개미들처럼 육신의 본능에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미가 후각의 일부분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듯이 우리들도 한 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살아있는 개미에 죽은 시체에서 냄새나는 올레산이 묻어 있으면 개미 무덤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올레산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죄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죄하고 밖으로 밀어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의 과거의 죄는 씻어주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용서의 삶을 우리도 따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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