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0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생명이냐? 소유이냐?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2장 13-21절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0. 들어가는 글
일본 열도의 재난도 냉정하게 보면 어느 한 나라의 죄도 아니요, 어느 한 사람의 죄가 아닌 모든 인류의 죄입니다. 이 재앙은 그동안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자연을 파괴한 온 인류의 죄이기에, 어찌 보면 일본은 희생양입니다.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고 있는 그들 곁으로 오직 긍휼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만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상을 숭배한 죄, 교만한 죄, 무신론, 물질주의 때문에 천벌을 받았다는 한국교회들의 발언 때문에 큰 논란이 생겨서 청와대까지 나서서 자제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일본 한 교단의 총회장인 센다이교회 요시다 타카시(50) 목사가 지진 직후 발표한 총회장 서신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로서는 잘 모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한 사람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할 일입니다.” 이웃나라의 고통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인명 피해가 가장 막심한 미야기현 마을에서 진정한 섬김을 보여준 사건을 접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직한 동사무소 여직원의 살신성인이 눈물겹기만 합니다. 끝까지 외치며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킨 엔도 미키(25)씨는 마을 방재대책청사에 남아 "쓰나미가 오니 빨리 도망치라"는 방송을 되풀이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행히 마을 주민들은 급하게 대피해 목숨을 구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쓰나미에 휩쓸러 가고 말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받친 이십대 처녀의 희생이 너무나 숭고해 보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의 재앙을 통하여 많은 희생자를 보면서 소유와 생명에 대하여 많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추구하는 삶이 소유인지, 생명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바라보느냐?
어느 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13절). 동생은 이유야 어떻든 아버지로부터 상속되는 재산분배에 있어서 형에게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형과의 상속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라고 책망하였습니다(14절).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바라보느냐?”는 우리의 생명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동생은 예수님이 소유의 문제만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소유보다도 더 중요한 생명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향하여 구원의 문제는 뒤로한 채 소유의 문제만을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는 영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등을 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유에 많고 적음에 따라서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5절).
2. 탐심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동생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언급했던 탐심에 대하여 대부분의 해석들이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탐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동생은 재산의 분배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이 아닌 세상 법정에 부탁을 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형이 동생에게 주어야 할 몫까지 가로챘다면 당연히 동생의 몫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형의 몫까지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면 탐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동생이 예수님이 생명을 구원하는 분이 아니라 소유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분으로 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탐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동생이 형에 대하여 가졌던 감정은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했다는 불만족이었습니다. 동생이 가진 불만족을 예수님이 말한 탐심과 연결시키면 소유하지 못했다는 불만족이 탐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불만족은 바로 생명이 충만하지 않다는 불만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지 못한 불만족은 없으면서 형 때문에 가지지 못한 불만족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무지에서 오는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에 대한 불만족보다 생명을 가지지 못한 불만족이 더 클 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동생의 재산 분배 문제를 거절하면서 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먼저 부자가 하나님에게 ‘어리석다’(20절)는 책망을 받았는지를 말씀한 이후에 두 사건을 연결하면서 주님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일먼저 부자는 모든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17절과 18절만 보더라도 “내가” 라는 표현을 통하여 모든 소유가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은 주인이신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고 필요로 하시는 곳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 물질을 쓰고 창고에 쌓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부자는 인생의 행복이 육체적 만족에만 있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19절 말씀에서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합니다. 부자는 인생의 만족을 육신의 즐거움에서 찾고 있습니다. 청년시절에 읽었던 에릭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는 저의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소유하는가?’ 보다 ‘어떻게 존재하는가?’ 가 더욱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말씀의 부자처럼 인생의 행복에 대하여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물질과 명예를 가져도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존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처럼 육체적인 만족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존재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셋째로 부자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20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부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될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든 영혼의 주인이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인 것입니다.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삶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유럽 벨기에 왕가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의 내용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레이놀드라는 왕자는 차기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그 동생 에드워드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형 레이놀드를 유커크라는 성에 가두면서 원하면 언제든지 창문을 통해 나가 자유인이 되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레이놀드 왕자의 현재의 몸에 비하여 창문은 극히 작았습니다. 동생 에드워드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형이 몸무게를 줄이고 저 창문을 통해 나올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형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 그렇지 못할 경우 나는 왕의 자리를 형에게 내줄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을 경비하는 이들에게 레이놀드 왕자가 원하는 대로 풍부한 음식과 간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했습니다. 레이놀드 왕자는 10년 동안이나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동생이 죽고 나서야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주어진 육신의 만족에만 급급하여 갇혀 있는 인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죽어간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세상이 주는 육신의 만족에만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만족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삶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으로 재산 분할을 요청하였던 동생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소유하지 못한 자의 불만족에 대한 탐심과 소유한 자의 만족에 대한 탐심을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진정한 불만족은 적은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진정한 만족 또한 많은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두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불만족과 만족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이라는 것을 양쪽 측면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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