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그리스도인의 고난
설교 본문 : 베드로전서 4:12-19절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0. 들어가는 글
사순절 셋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지진보다 방사능으로 인하여 더 큰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한 여인이 결혼을 눈앞에 두고 파혼을 당하였습니다. 방사능 유출 피해가 우려되는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이유로 헤어진다면 후쿠시마 여자니까 연애나 결혼은 안 된다는 사회적 차별이 생길까봐 무섭다고 합니다. 또한 후쿠시마 출신의 피난민들에게는 호텔이나 여관의 숙박이 거부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한 이후에 사회적인 차별까지 당한다면 고난보다도 차별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고난과 사순절이 클로즈업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왜 불 시험이라고 말하는가?
베드로전서에서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불시험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합니까? 말씀에 담긴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서기 64년 로마제국의 네로황제 때 로마시가 화재로 불탔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전체로 번져서 온 시가지가 폐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의 절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 화재의 원인을 네로 황제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네로황제는 자기에게로 향하는 비난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가든파티를 밝히는 인간 장작으로 삼아 불태워 죽였고 원형극장에서는 사자들의 먹이 감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구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시련과 고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며 오직 하나님과 천국의 소망을 두고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는 당시 네로 황제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후에 쓰여 진 편지였습니다.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련을 불시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얼마나 핍박과 고난이 극심했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이고 또 하나는 기쁨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소망입니다. 실제로 이 세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이 세단어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즉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 주신 소망으로 인해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고난 받지 말라.
오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15절에서 살인이나 도둑질이아 악행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더 말씀하십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남의 일에 간섭하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도 이웃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에 대하여 간섭하는 자가 아니라 도와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섭하는 자와 도움을 주는 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말로만 도와주면은 간섭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해결 해주면 진정 도움을 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그 건널목에서 브레이크 고장으로 아들을 치어죽게 했던 사람에게 선처를 베풀었으나 그 마음의 한을 풀지 못하였습니다. 사고를 낸 그 사람은 날마다 찾아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그 아들 하나 의지하며 살아왔던 그 여인은 도저히 용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찾아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사죄하는 그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어 용서는 물론이요 십여년간 병수발하며 아내를 돌보다 이제 혼자된 그 사람을 가엾게 여겨 그 남자와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자매 있는 집안에서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하면서도 전처의 딸들로부터 질시를 받곤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지 못했던 딸들은 그나마 조금 있는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 들어왔다 여겼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죽으면서 모든 유산을 그녀에게 넘겨주자 갈등은 극에 달하여 더욱 그녀를 미워했습니다. 그럴수록 그녀는 묵묵히 인내하며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딸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안정이 되었을 때 그녀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 속으로 난 자식들이 아니지만 난 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단다. 너희 아버지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게 했지만 이렇게 더 많은 자녀들을 내게 주었구나” 지난 날 아버지와의 관계를 듣고 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세 딸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유산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정작 자신이 틈틈이 벌었던 재산까지 몽땅 내놓았습니다. “이제 조금 남은 것으로 고향 가서 살렸다. 부디 서로 의좋고 행복하게 살거라” 세 자매는 그동안 모진 말과 행동으로 괴롭혔던 것을 후회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자녀들에게 어머니 소리를 듣고 그 여인은 울고 말았습니다. “이제 되었다. 너희들이 어머니라 부르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단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당신을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편강도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한마디의 고백이 고통스러웠던 십자가위에서도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이십니다. 단지, 당신을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그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인생이 아니라 인정해주는 인생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
고난 중에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입니다. 19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과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14절).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칠배나 뜨거운 불 못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당하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가운데 주저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좌절이나 낙심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면 주님을 의탁할 때 고난의 터널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17세에 엄마를 여의었지만 갖은 어려움을 꿋꿋이 극복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훌륭한 배우자와 결혼해 출산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이상했습니다. 온몸에 발진이 생겼고, 심한 발작과 호흡곤란 증세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의사들까지 포기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담당 의사는 “이젠 아기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고 힘겹게 말했습니다. 저토록 고통 받는 아이를 붙들어야 하느냐 놓아야 하느냐, 고뇌하고 갈등하며 기도하는 엄마의 절박한 모습에서 “하나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하는 기도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엄마 기도의 선택은 아이를 붙드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의사들도 포기한 아이를 ‘엄마의 눈’으로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집 청소를 하는 화요일만 되면 아이 증세가 더욱 심하게 악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청소제품에 포함된 염산 암모니아 같은 성분들이 문제였고, 유독 성분을 없애자 아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시련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서 이겨낸 것이었습니다. 어디 이것뿐입니까! 아이를 울리던 유해 성분이 없는 제품을 만들어 같은 처지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연 매출액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무해세제 회사인 ‘소프웍스(soapworks)’가 탄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속에서 머뭇거리고 주저앉아서 눈을 감고 막연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옳은 결정을 통하여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우리 주님은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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