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주님이 가시는 목적?
설교 본문 : 누가복음 9장 51-56절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0. 들어가는 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안팎으로 시끄럽습니다. 한기총의 이권 개입과 금권 선거 폭로가 이어졌습니다. 구임원과 신임원이 양측으로 갈라져 자신들 밖에 한기총을 개혁할 사람이 없다고 싸웁니다. 결국 세상 법정이 한기총의 대표회장에게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분들이 한국교회를 끊임없이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진흙탕 싸움의 한기총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 떠올랐습니다. 소말리아 해적선의 해적들이 선장을 뽑기로 했습니다. 힘세고 돈 많고 욕심 사나운 해적이 갖은 못된 짓을 해서 경쟁자를 누르고 선장이 되었습니다. 싸움에서 밀린 해적이 하소연을 합니다. 저런 나쁜 놈이 우리 해적선의 선장이 되어서야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해적선 안에서 해적들끼리는 그 억울함이 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고통 받는 선량한 뱃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나 너나 똑같은 해적인데 누가 선장이 된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선장 하나 손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해적선이라는 존재 자체가 문제입니다. 한기총 대표회장 한분 손본다고 무어가 달라지게 씁니까? 고소한 목사님이나 고소 받은 목사님이 똑같은데요. 어찌보면 감투에 눈이 멀어 금권선거로 얼룩진 한기총 자체가 문제인지 모릅니다.
어려운 한국교회 상황 속에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을 제자들이 몰라서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바르게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사마리아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서 하룻밤 묶을 방을 알아보았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거절을 당한 이유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거절이었습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거절을 당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앗시리아는 점령한 나라들에 대하여 혼열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과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오히려 사마리아인들을 더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마리아인들의 과거의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예수님을 향한 거절감으로 투영되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권위의 대상’이나 ‘좋아하는 대상’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거절당한 경험이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면 그와 유사한 상황이나 전혀 반대의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표출되는 감정이 바로 ‘거절감’입니다. 자신을 거절한 그 대상(권위의 대상/ 좋아하는 대상)을 미워하고 분노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거절당한 상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거절하는 마음의 상태가 자신을 슬픔감정에 불필요하게 많이 빠지게 만듭니다. 이어서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고 심하면 자기 증오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거절감의 상처를 가장 잘 극복하여 은혜를 받은 인물이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자신의 딸이 고침받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대답을 통하여 거절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막7:28).
남아공에서 흑백차별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흑인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백인 남자가 그 여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여자는 멈춰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아이들 차례입니다. 궁지에 몰린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흑인 여자 사이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절감을 넘어서서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거절하는 말까지도 수용함으로 인하여 긍정으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2.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유?
이번에는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반응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거절한 그들을 바로 응징하고자 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들의 화풀이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징계하거나 저주하는 용도로 사용치 않았고 자신의 편한 삶을 위해서도 사용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탔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며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탈출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간수장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옥문이 열렸을 때 탈출하지 아니하고 한밤중에 간수장의 집에 찾아가 그 집 모든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날 로마시민임을 밝히고 정식으로 풀려났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의 유익을 위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구원하는 일에만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는 이유?
이제 왜 제자들이 꾸지람을 받고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꾸지람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를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은 승천 전에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먼저 경험해야 하는 단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장차 왕이 되실 예수님을 통하여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대접은 고사하고 거절을 당하자 분노가 치밀어서 그들을 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장차 당할 고난에 비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절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높임과 대접을 받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는 정말 속상한 일이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높임과 대접 받기를 원하는 길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길을 가고자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요사이 주님이 제 마음을 테스트 하는 것 같습니다. 금주에 노회가 있어서 지난주에 노회 자료가 왔습니다. 교회 현황에 대에 보고를 보는데 다른 교회들은 금년도 보고가 모두 반영이 되었는데 우리교회만 금년도 보고가 반영되지 않고 작년치가 그대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사실 여려가지 생각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사람에게 보여지는 평가보다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한 번 더 제 마음을 테스트 하셨습니다. 우리교회가 순번이 되어서 한신대학 신학생들에게 약간의 장학금을 보냈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보낸 것들은 다 올라와 있는데 한신교회만 누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보다 더 작은 액수도 올라와 있는데 우리교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사람에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것인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제 마음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제가 가는 길이 직업인지 소명인지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중간쯤 걸쳐 있는 느낌입니다. 제 자신이 직업이라는 생각이 컸다면 노회 보고나 장학금 문제로 거절감의 상처와 맞물리면서 내가 이룬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많이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으로 가고 있다면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며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들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을 잘아야 합니다. 그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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