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0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탁월한 자와 신실한 자
설교 본문 : 골로새서 1장 1-8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0. 들어가는 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종려주일입니다. 카이스트의 학생이 올 들어 벌써 네 명째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각각의 인생에는 다른 사연들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카이스트의 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가서 오히려 살아야할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카이스트는 서남표 총장이 취임하면서 무한경쟁으로 돌입했습니다.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4.3만점의 학점에서 3.0이하가 되면 벌금형식의 등록금을 내게 했습니다. 그것도 0.01점마다 6만3천원으로 계산해서 최대 700여만 원을 내도록 했습니다. 카이스트 성적 산술방식은 상대평가로서 30% 이상은 3.0 이하의 성적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이 대학에 왔다는 학생들이 이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 대학을 보면서 격투기의 철창게임이 생각났습니다. 싸움을 잘 한다는 근육질의 사내들이 철장 안에서 피를 튀기며 쓰러지기까지, 아니 쓰러져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워대는 경기입니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근육질 대신 두뇌질을 가지고 학교의 철장 안에서 피를 튀기며 쓰러지기까지, 아니 쓰러져 죽기까지 동료를 이기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의 너 죽고 나 살기의 무한 경쟁을 보면서 어느 개그방송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제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1등만 하는 탁월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을 원할까요.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탁월함속에 담긴 위험성
지금 한국 사회는 뒤처지면 죽는다는 생각과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이 한국 교회에 그대로 유입되어 강단에서조차도 탁월함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러 숫자를 많이 모으고 큰 교회를 건축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탁월한 목회자들로 얼마나 대접을 많이 받았습니까.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얼마나 박탈감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대형교회를 이루어서 탁월한 목회자로 대접받던 분들이 성적인 음란과 물질의 탐욕과 감투에 대한 명예욕으로 무너져서 한국교회가 동반하여 추락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최대의 효과'를 기대하는 탁월함이라면 굳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도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유는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탁월함이 아닙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순종하고 반대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을 일으키고 큰 물고기를 준비시켜 요나를 회개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방법만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탁월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탁월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사를 직접 보내 그 일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순종 잘하는 호세아를 대신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굳이 요나를 회개시켜서 다시 니느웨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큰 뜻도 있었지만, 요나 한 영혼을 회개시켜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만들고자 하는 고귀한 뜻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탁월한자를 세워서 최대의 효과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한자를 찾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신실하게 섬길 수 있는 자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2. 신실함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탁월한 자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자를 세우시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2절). 또한 골로새 교회에 가장 선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도 신실한 일꾼이었던 에바브라였습니다(7절).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뛰어난 업적을 보면서 주눅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심지어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자신의 교회가 규모가 작으면 이내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는 마태복음에 있는 달란트 비유를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동일한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일등만을 기억하고 일등만을 칭찬하는 한국적 분위기와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은 일등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도 신실하게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를 칭찬하십니다.
제게 감동을 주었던 창성교회 함대붕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부부는 20년 이상 충청도 보은 산골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몸이 아픈 노인들의 몸을 직접 안마해 주었습니다. 또한 새벽기도를 마친 후 마을의 할머니들을 차에 태우고 산 넘어 장터에 모시고 가서 전날 캔 나물들을 팔게 한 후 다시 집에까지 변함없이 모셔다 드렸습니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시골 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이야기입니다. 최대의 효과를 강조하는 탁월함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시골목사님의 이야기는 된장국의 진한 맛이 우러나오듯이 감동이 있습니다. 세상은 탁월함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지만 교회만은 신실함으로 평가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3. 탁월함에서 신실함으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은혜입니다.
세상의 가치인 탁월함이 하나님의 가치인 신실함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은혜의 다리를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오늘 6절 말씀에서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탁월한 능력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에 대한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은혜를 모르면 결국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따르는 경건한 무리들에게 가장 강조에서 권면한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행13:43). 경건에 대한 탁월함이 은혜의 강을 건너야지만 자신의 의가 되지 아니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탁월함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장로님들과 함께 노회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노회는 유난히 논쟁이 심했습니다. 노회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면서 장로님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저도 논쟁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안 되어서 참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면서 장로님들에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내 자신 안에 탁월함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논쟁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내려놓아야만 겸손히 은혜에 젖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탁월함은 드러내고 싶지만 부족한 모습은 감추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저의 가족들이 가정에서 있었던 저의 부족한 점을 재미있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재미는 재미로 끝나야 하는데 은근히 속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떠나면 자녀들을 혼내기 시작합니다. 아빠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도 시원치 않는데 흉을 보았다고 심하게 야단을 칩니다. 저의 부족함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데 외식에서 벗어나 신실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 보내면서 기도하는 내용은 “주님 제 자신이 큰 업적을 이룬 탁월 종은 될 수 없어도 부족하지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면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신실한 종이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대단한 능력이 나타난 탁월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무능하게 죽어갔지만 신실함으로 모든 것을 짊어진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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