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4일 부활절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마음
설교 본문 : 누가복음 24장 13-27절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서 만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장미꽃 향기를 맡을 여유를 잃지 말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장미꽃을 즐기려면 반드시 감각과 마음을 최대한 온전히 꽃송이에 근접시켜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향기를 맡으려면 가까이 다가가 한동안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꽃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 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유를 내서 장미꽃의 향기를 맡으면 그 아름다운 냄새가 한동안 좋은 인상으로 남습니다. 충분히 자꾸 되살리기만 한다면 삶 전체의 질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 간단한 예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장미꽃의 향기를 즐기려하여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최대한 감각을 집중하여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향기를 맡기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중하여 머무는 시간들이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향기를 맡은 기쁨들이 없기 때문에 삶 전체의 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에게 마음을 다하여 집중함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향기를 맡아 우리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이해하는 것보다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의 향기를 맡지 못하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5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16절 말씀에서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이 가리어져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함께 동행하는 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기리어졌다”는 것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함으로 옆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정력“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해력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해는 우리의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면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신뢰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면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상대방을 마음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느 날, 폴 뚜르니에라는 유명한 기독교 상담가가 임종하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힘들게 “폴! 나는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그 때 폴은 “자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인정하는 것이네” 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친구가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맞아! 인정하는 것이지” 라고 하면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다 이해가 되어야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 그것은 안 믿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다 이해가 되어서 사람들을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평생 외톨이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사람과 15년 이상 살았지만 내 생각으로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때론 이해가 안 되어도 인정해주면서 살다보면 나중에 이해가 되는 부분이 생김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외면하지 말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먼저 인정할 때 우리 마음에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보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22,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우리 안에 믿음이 없다면 지금 예배당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면서 “내가 부활한 예수다”라고 보여준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그들 안에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오늘 25절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먼저 마음에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해 천안함 침몰 사건은 온 국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천안함에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일에 가장 큰 어려움을 주었던 것은 바로 수압이었습니다. 결국 한준위가 천안함 구조 작업에 참여하였다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제일 큰 거대한 핵잠수함도 바다에서 수심 700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엄청난 수압 때문에 찌그러집니다. 그런데 몇 천 미터 이하의 심해에도 지상에 알려진 종보다 훨씬 더 많은 종의 심해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심해생물들이 어떻게 핵잠수함도 찌그러지는 곳에서 살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심해의 거대한 수압보다 심해생물 속의 내적인 압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거대한 외부의 압력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면 자신 안에 믿음의 강한 압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 충만을 통해 믿음의 압력이 강해지면 고통과 상처의 압력이 그를 무섭게 짓눌러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외부의 압력을 통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내부의 더 강한 믿음의 압력이 있어야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훈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훈계를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정죄하며 징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훈계를 통하여 그들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훈계를 들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마음이 회복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훈계를 들은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반응을 합니다(32절). 예수님은 그들의 식어진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훈계와 정죄는 다릅니다. 제일먼저 정죄는 과거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훈계는 미래에 바르게 세워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부활을 믿지 못한 과거의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을 설명함으로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과거의 잘못을 언급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죄는 상대방에게 분노나 적개심의 감정을 분출하게 됩니다. 훈계는 최대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 두 제자에게 부활한 자신을 몰라본다고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줌으로 두 제자의 집에 초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밤새고기 잡은 베드로에게 모닥불까지 준비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사랑과 관심을 통하여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죄를 받으면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훈계를 받으면 사랑을 받는 평안함을 가지게 됩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이후로 마음이 뜨겁게 회복되어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더 이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사랑을 확인하고 죄책감이 사라지고 영적인 평안을 누렸습니다.
부활은 회복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복보다는 정죄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복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의 훈계를 통하여 회복을 시켜야 합니다.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생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외부의 압력을 이길 수 있는 내부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죄보다는 회복이 목적이 되어야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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