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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10장 7-10절/ 5월 22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05-22 추천 0 댓글 0 조회 423

2011년 5월 22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주님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0장 7-10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0. 들어가는 글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각 가정마다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번 언급했던 여자의 머리에 쓰는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시작하고자 합니다(고전11:5).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여성도들이 미사포를 쓰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단인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성경대로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왜 여인들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했는지에 대한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지역의 신전에서 머리를 민 여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신전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매춘행위를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왔지만 머리를 민 것이 일반 여인들과 구별되어 창녀로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머리를 민 신전의 창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여인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머리를 민 신전의 창녀들을 위한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쓴다면 사랑의 의도는 망각한 채 종교적 의식만 남아 있는 겁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머리에 쓰는 종교적인 의식보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본래의 사랑의 의도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의식만 남아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케 하려는 사랑의 의도는 망각한 채 종교적 의식만 지킨다면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을 마르게 할 수 있습니다(10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의 의도를 깨닫고 생명을 풍성케 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할례 문제를 통하여

초대교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할례문제였습니다. 할례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릴 때 다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로 인하여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교인으로 받아드리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대표적인 두 제자가 디모데와 디도로서 둘은 모두다 헬라인이었습니다. 두 제자 중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하였지만(행16:3), 디도에게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갈2:3). 만약 할례를 받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의 논쟁을 하게 된다면 한 명은 의인이 되고, 한명은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에 사도 바울에게는 할례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느냐?” 가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효과적이었습니다.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주님의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은 할례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는 할례의 문제에 유대인들처럼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복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들이 아닌 일들에 다툼과 갈등으로 인하여 정작 생명을 살리는 일들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처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의 복음에 마음을 다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이혼 문제를 통하여

초대교회에서 또 하나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이혼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혼을 해도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는 많은 고민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남자는 아내를 내보내면서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의 문제에서 대체로 의롭고 선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태우거나 너무 짜게 만들어도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입장은 ‘부정함’ 아니고는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할례를 바라보는 입장과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보다 그 상황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때 생명을 살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혼을 하는 것은 여자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이혼한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뿐이었습니다. 첫째는 친척 집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들어가서 하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한 남자의 두세 번째 여자가 되어서 언제나 불량품 신세로 구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창녀로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이혼은 한 여자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혼을 금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여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혼을 금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혼을 하지 말라’는 강조보다는 여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더 큰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어느 신앙심 좋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동성연애자라는 실체를 감추기 위해 자신과 결혼하였습니다. 완벽하게 결혼절차를 마친 이후에는 남편이 동성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신앙심 좋은 아내는 종교적 기준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참고 견뎠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죽음의 나락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이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혼은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른다면 “어떤 선택이 한 여인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느냐?” 는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관점이 예수님의 생명을 더 풍성케 하는 말씀과 일치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3. 음식 문제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율법에서 할례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음식문제였습니다. 구약 레위기에서 새김질과 굽이 갈라지지 않는 짐승은 부정한 음식으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레11:4). 또한 수중 생물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도 부정한 음식으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레11:10). 여기서도 ‘부정한 음식이냐?’, ‘정한 음식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정한 음식은 당시에 생명을 해할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새김질을 하지 않는 부정한 짐승이 돼지입니다. 돼지는 40도가 넘는 사막기후에서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음식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대표적인 오징어도 더운 기후에 쉽게 상하여 생명을 해할 수 있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냉동을 통하여 그런 음식들이 생명을 해하지 않도록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어떤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자에 매이지 말고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해치는 음식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니코틴이 될 수 있고, 알코올이 될 수 있고, 카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합니다(골2:16,17). 부정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자 프란시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성령의 강한 은혜를 얻기 위해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면서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아침마다 맛있는 죽을 쒀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한 20일쯤 되었을 때 제자 중 한사람이 참다못하여 죽을 그만 한 숟가락을 떠먹고 말았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프란시스코는 바로 일어나 자기 앞에 놓인 죽을 한 그릇 다 먹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스승님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금식하며 형제를 미워하기보다는 먹고 형제를 더욱 사랑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금식기도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것보다 한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소중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례문제와 이혼문제와 음식문제를 함께 집약에서 볼 수 있는 것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라는 율법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눅6:7).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가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눅6:9).

바리새인들은 율법 안에 갇혀서 생명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만든 법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매여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하신 은혜를 우리들의 삶속에서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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