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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변화/ 마태복음 18: 21-35절/ 31쪽/ 6월 2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06-29 추천 0 댓글 0 조회 327

2011년 6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용서와 변화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8: 21-35절/ 31쪽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입니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예일대 법대 교수 에이미추아 쓴 ‘제국의 미래’란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세계 최고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관용’을 통하여 풀어갑니다. 세계를 제패하려면 가장 필요한 인재를 얻어야 하는데 그 최선의 방법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본문 속에서 “인종, 종교, 민족, 언어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기에 로마, 몽골, 미국 등이 동시대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관용 없이는 성공적인 미래를 건설하기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에이미추아가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 강대국이 된 비결을 관용에서 찾고 있지만, 그 초강대국 로마를 이긴 힘이 바로 기독교의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심지어는 순교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적의를 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용으로 세계 초강대국을 이룬 로마를 용서의 힘을 통하여 기독교 국가로 변화 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상반기의 모든 것들을 용서하고 하반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당시 문화, 종교적 관점과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비교

예수님 당시 용서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벤시와 같은 바리새파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에 해당하는 일곱 번의 용서를 제안하고 있습니다(21절). 우리들은 이웃들의 잘못에 대하여 몇 번씩이나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새 지평을 여셨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숫자를 세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는 예수님의 용서 법은 숫자상의 어떤 기준을 초월한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22절).


5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롬은 기뻐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릴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슨 선물을 내게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이 성경을 다 번역해서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죄와 고통을 다 내게 다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용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죄와 고통을 드려서 용서받는 것입니다.


2. 용서 받은 은혜가 없기에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22절). 한 달란트는 일꾼 한사람의 3년 품삯에 해당합니다(현재 일억 정도).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주인의 처분에 따라 가족들까지 노예로 팔려야만 했습니다(25절). 그러나 종의 처지를 주인은 불쌍히 여겨 그 빛을 탕감해 주었습니다(27절). 하나님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절대적인 사랑의 용서하심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저히 깊을 수 없었던 만 달란트를 용서 받은 자의 반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탕감을 받은 사람은 용서 받은 은혜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탕감을 해 준 주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큰 용서를 받은 그가 전혀 삶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진정 용서 받은 열매는 삶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고 있습니다(30절). 우리들도 예수님을 통하여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웃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전갈이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개구리에게 “나 좀 태워 달라!”고 했습니다. 개구리가 반문했습니다. “전갈아! 내가 너를 태울 때 네가 등에서 나를 물면 내가 죽는데 어떻게 태워주니?” 전갈이 대답했습니다. “개구리야! 너는 뇌도 없냐? 생각해 봐라. 내가 너를 물으면 나도 같이 죽는데 물겠냐?”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개구리가 전갈을 태워줬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전갈이 개구리를 꽉 물어 둘 다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왜 물었니?” 전갈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물어야 하는 전갈이잖아.” 그만큼 천성은 변화되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중동 격언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산이 움직였다고 하면 믿어라. 그러나 사람의 성격이 변했다는 말은 믿지 말라!” 이처럼 사람이 변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의 용서를 아는 자는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모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왜 용서를 하지 못하는가?

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실마리가 26절에서 나옵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라고 합니다. 값을 것이 전혀 없는 그가 “다 갚으리이다” 라고 말하는 마음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요? 첫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용서와 치유의 출발은 현실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의” 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일수록 은혜의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 노력으로 살아간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인의 마음을 전혀 모릅니다. 주인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보다 항상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도 만달란트 빚진 자처럼 “왜 갚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29절) 사실 백 데나리온은 석달만 일을 하면 실제 갚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이 둘을 연결하여 보면은 만 달란트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는 갚을 수 없는 사랑이지만, 백 데나리온을 통하여 이웃 간의 사랑은 갚을 수 있는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 이무석 교수의 “마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왜 용서가 잘 안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용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인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용서를 아무리 외쳐도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영적인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용서를 실천하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원하고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영적인 자존감이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상반기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용서를 하고 하반기를 새롭게 출발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상반기에 있었던 일을 모든 용서하고 하반기를 새롭게 시작할 때 주님의 예비하신 놀라운 사랑이 우리들의 삶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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