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한 영혼 가치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5장 8-10절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리플리 증후군” 이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에서 많은 이슈가 되었습니다. 리플리는 “재능 있는 리플리씨” 라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소설 속 리플리는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반복하다 결국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환상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런 유형의 인격 장애를 “리플리 증후군” 이라고 합니다. “리플리“라는 뜻은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실제처럼 여기며 행동하는 경우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사람이 이룰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도피하기 위해서 리플리 증후군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현실을 감추고 포장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심해지면 그 거짓말을 사실처럼 믿는 리플리 증후군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신천지라는 이단에 빠진 사람에게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영적인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단에서 지내다가 거짓인줄 알면 벗어나야 하는데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거짓을 진리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도 영적 리플리 증후군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는 한 영혼의 치유와 회복은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시작 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의미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반부에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가 나오고, 중간 부분에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가 나오며, 후반부에 “잃은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가 나옵니다. 세 가지 비유는 모두 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린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시 찾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비유는 중간 부분에 있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다른 두 비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나는 비유가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찾는 메시지는 다른 두 비유에 비하여 전혀 뒤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지금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데 왜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그렇게 애를 썼느냐? 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결혼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청년이 약혼녀에게 열 드라크마로 장신구를 만들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약혼녀는 그것을 잘 간직해 두었다고 결혼식 때 머리에 장식하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는 약혼한 여인이 결혼 전까지 사랑의 정표로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면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가 있어야 아홉 드라크마도 사랑의 정표로 온전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이 비유는 잃은 영혼을 찾는 것이 단지 그 영혼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도 살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잃은 영혼을 찾아야 하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무기력한 신앙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은 영혼을 찾고자 했을 때 내 영혼도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2.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모습
약혼한 여인이 사랑의 정표로서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 여인은 결혼식 날 신랑을 사랑하는 정표로 열 드라크마로 머리를 장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얼마나 열심히 찾았겠습니까? 약혼한 여인의 찾는 모습에 대하여 8절에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여인의 찾는 모습에서 첫 번째로 등불을 켜고 있습니다. 잃은 드라크마가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인처럼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집을 쓸고 있습니다. 잃은 드라크마가 먼지 속에 묻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먼지 속에 묻혀 있는 영혼들을 사랑의 빗질을 통하여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로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기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가지 찾아낸다는 사랑의 행동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부지런한 행동에 은혜를 받습니다. 참으로 오늘날에도 이런 여인과 같은 신앙의 행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몇 주 전 장로님들과 당회를 마치고 국수를 먹으러 간적이 있습니다. 제가 차를 운전하면서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저는 길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 네비게이션으로 길을 찾기 쉬운 편리함은 생겼지만 정작 우리의 기억력은 점점 쇠퇴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제품으로 인하여 지적인지장애를 격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단 사회적인 습관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면 영적인지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 경건한 삶이 사라지고 종교생활을 내가 편리한 방법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상술적인 신앙생활로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버튼 누르면서 기독교 방송을 통하여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 없다면 그 믿음을 어찌 좋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해가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영적인 부지런함으로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내 안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오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9절에서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 드라크마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돈의 가치보다 사랑의 가치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여인이 드라크마를 집안에서 찾는다는 것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장소가 들판이었다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장소는 집안이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잃은 영혼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잃어버린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잃어버린 영혼이 될 수 있습니까? 내 안에 숨어있는 상처가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30년만의 휴식”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조급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급한 아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엄청난 걸림돌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 왜 조금한 아이가 자리 잡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큰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원하지 않았던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열등감의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이 시간에 대한 조급함으로 나타나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제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슨 자신에게 해당하는 상처받은 아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0년만의 휴식” 이라는 책안에 성난 아이, 질투하는 아이, 의존적인 아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 의심 많은 아이, 잘난 체하는 아이, 조급한 아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아이, 두 얼굴을 가진 아이 등 상처받은 아이가 각자의 인생을 괴롭히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상처로 잃어버린 아이를 찾을 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완성되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집사람이 수요저녁예배에 조금 늦게 들어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난리 났습니다. 늦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데 머리는 그렇지 않는데 마음에서 조급한 아이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의 증상입니다. 제 자신의 상처를 알기에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먼저 늦었다고 정죄하기 보다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고 집사람 입장에서 물어보았습니다. 중요한 상담이 있어서 도중에 멈출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조급한 아이와 화해를 이룬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 기도를 하면서 제 자신을 칭찬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신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정글 속에 천국을 짓는 사람”과 같은 책을 읽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는 내가 왜 장요나 선교사처럼 살지 못하는가? 라고 하면서 내 자신을 자책하거나 괴롭혔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역반응으로 선교사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암에 걸린 사모님을 버려두고 떠날 수 있어”, “자식이 자살직전까지 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정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 자존감을 많이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장요나 선교사님을 사용하는 그릇과 지금 나를 사용하는 그릇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요나 선교사님은 부부가 떨어져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책을 읽고 있는 주간에 오신 인도의 정병권 선교사님은 16년 동안 선교하면서 부부가 한 번도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바울은 독신으로 선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정을 이루고 선교하였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많은 선교사님과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이제는 어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프리카냐? 베트남이냐? 한국이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어진 자리에서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진정 주님의 선교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내 안에서 잃어버린 상처의 드라크마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너무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상처의 드라크마를 찾아서 조금이나마 주님을 더 성숙한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교회밖에 잃어버린 영혼도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잃어버린 상처의 아이도 찾아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사역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 주님과의 사랑이 완성되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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