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아버지의 용서를 알았다면...
설교 본문 : 사무엘 하 14장 28-33절
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0. 들어가는 글
인생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한 것처럼 보입니다(33절).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화해였을까요? 이후에 이어지는 압살롬의 반란을 보면은 진정한 화해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를 너무 패륜아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아버지 다윗의 책임은 없었을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아버지 탓만 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과 화해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 형성
압살롬의 행동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다윗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첫째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 하였을 때나 압살롬이 누이 다말에 대한 복수로 암논을 죽였을 때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암논의 죽음은 잊어져 가고 도망친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5년 동안 전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이런 다윗을 우유부단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다윗의 유형은 방임형 아버지에 해당합니다. 방임형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으며, 자녀들을 상대해 주지도 않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며, 제 멋대로 행동하고, 반성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으며, 기존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압살롬에게 이런 성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압살롬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여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반란도 일으키며, 자신의 멋대로 행동한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백주대낮에 아버지의 후처들을 성폭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없이 하고, 기존의 권위에 반항하여 아버지를 상대로도 반란을 일으킵니다.
방임형의 반대 유형인 과잉보호도 문제입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극도로 희생하고, 모든 일을 대신해서 해주고, 징계하기 두려워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독립성 결여로 사회적응이 어려우며, 안하무인격의 버릇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한 부모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변명만 일삼는 무책임한 인간이 됩니다. 강압적인 부모와 그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눈에 자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녀의 결점을 찾아 비난조의 훈계를 합니다. 또한 부모의 의사나 결정을 자녀에게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욕구불만이 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됩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할 때 자신감이 없으며, 불안과 염려와 실수에 대한 강박경향이 있습니다. 배척하는 부모와 그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고, 자녀들을 무시하기가 일쑤입니다. 또한 자녀에 대한 스킨쉽이 거의 없으며, 평상이 관심이 없다가 때로는 지나치게 화를 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위 사람과 화합하지 못합니다. 또한 애정에 굶주려 있으며, 공격적인 행동과 비행을 저지릅니다. 편애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질투심이 강하고 자녀들 간에 경쟁심이 많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뿌린 씨앗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좋은 씨앗들을 뿌리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결과이다.
어떤 부모님을 만났더라도 주님을 믿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압살롬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과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이 누이 다말의 복수로 이복형인 암논을 죽이고, 외할아버지 그술 왕의 집으로 도망친 3년의 기간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2년 동안 아버지 다윗을 대면하지 못하였습니다(28절). 왜 압살롬은 5년 동안 아버지 다윗 왕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아무리 아버지 다윗을 만나고 싶더라도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진정한 회개 없이는 왕이 되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보고자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고 합니다(32절). 압살롬처럼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죄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고 죄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처럼 왕이 되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 재산 절반을 탕진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둘째 아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화해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15:21). 정말 압살롬과 대조를 이룹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났지만 죄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처리되지 않는 죄는 상황과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는 화해는 거짓 화해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을 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알았다면...
압살롬의 처리되지 않는 죄는 결국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패륜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이 자신을 향하여 무조건적으로 용서했다는 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너무나 큰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에게로 도망칠 때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는 마음속에 용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삼하13:37절). 다윗의 용서한 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에 드러납니다(삼하13:39). 아버지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을 이미 사랑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변함이 없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 상항에 따라서 다시 예전의 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용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고 일관성 있게 나타납니다. 다윗 왕이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전쟁 중에도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합니다(삼하18:5). 다윗은 나중에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가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라고 합니다(삼하18:33). 이것이 자신의 큰 아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반역하고, 자신의 후궁들을 범하고, 자신을 죽이려 한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용서의 반응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압살롬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일관되게 용서를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정말 아쉬운 것은 압살롬이 이런 아버지 다윗왕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도 아버지랑 참으로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그로인해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자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저를 향하여 ‘이런 사랑을 주셨구나!’ 라는 마음이 들면서 부모님과 화해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압살롬과 같은 동일한 우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윗보다도 더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이 아무리 용서를 하였을지라도 아들 압살롬이 회개하지 않으면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용서를 이루었을지라도 우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치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주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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