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 마가복음 6:1-6절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0. 들어가는 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9월 첫 주입니다. 열매를 맺는 계절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에서 목회할 때 청년들을 데리고 인도 단기 선교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뉴델리 지역에서 전도를 하는데 길하나 사이를 두고 이쪽은 하류계층이 사는 지역이요, 건너편은 보통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류계층지역에서 집집마다 길을 따라서 전도지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전도지를 친절하게 받고 어떤 사람은 격려도 해 주어서 우리 청년들이 아주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이제 점심을 먹고 길 건너편 보통사람들 지역에 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전과 다르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싸늘하게 대하고 얼마나 배척하는지 모두들 영적으로 짓눌리다 보니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저녁에 돌아와서 평가회를 하면서 길 하나를 두고 빈민가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복음에 대한 대조적 반응을 보고 놀랬습니다. 한 쪽에서 복음을 환영하고 한쪽에서는 복음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두 가지의 반응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1절). “거기는 어디입니까?”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갈리리 바다 옆에 있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가장 잘 영접한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에서 아주 놀라운 권능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던 지역이 바로 이 가버나움입니다. 또한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치료받았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 소문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성장한 곳은 나사렛입니다. 오늘 고향으로 갔다는 말은 나사렛 동네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향인 나사렛동네는 가버나움 분위기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나사렛지역은 주님이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경험과 오늘 말씀을 연결하여 보면은 “왜 어느 지역이나 사람에게는 복음의 권능이 나타나는데 왜 다른 지역이나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혹시 우리 자신에게 직면한 문제는 아닙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권능이 나타나는데 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관심 이상을 추구하지 못함(2절)
나사렛 지역에서 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나사렛 사람들이 관심 이상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보면은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만 보면은 듣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어디서 얻었는지 관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관심이 긍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 관심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당에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관심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교회 분위기 참 좋구나, 성가대 찬양이 참 마음에 와 닫네,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나쁠 것 이 없네" 정도의 관심만을 통해서는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관심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는 일들은 과연 얼마나 되고 있습니까?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면 주님의 권능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관심에만 머물지 말고 말씀에 반응하여 결단하고 실천하여 주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편견을 극복하지 못함(3절)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3절 말씀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 지라"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배척하는 마음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배척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큰 손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심하게 핍박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멕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된 사도 바울의 모습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도 바울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 편견을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을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을 배척할 때 유일하게 바나바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동역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모든 편견이 없어짐으로 어떤 영혼도 배척하지 않는 사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우리들의 삶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습니까! 지역에 대한 편견, 학력에 대한 편견, 교단에 대한 편견, 노숙자에 대한 편견,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 등 많은 편견들에 갇혀 삽니다. 이런 편견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성도님 중에 설교하는 저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편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믿지 않기 때문(5,6절)
이제 예수님이 권능을 행할 수 없는 마지막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지 않기 때문에 권능을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고 합니다. 왜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를 5절에서 보면은 조금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5절 말씀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라고 나옵니다. 소수에게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면은 다수의 분위기가 예수님을 배척하며 믿지 않는 분위기였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분위기에 휩쓸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다수의 분위기에 휩쓸려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 우리들이 소수에 속할지라도 믿음을 지키는자가 될 대 주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자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간도에 김약연, 김하연, 문치정 등이 이주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간도에서 땅 사만평을 구입하고 그 중에서 만평을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 사업에 내어 놓았습니다. 이 자리에 일제 시대에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던 명동학교가 세워집니다. 명동학교를 통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명동학교 초기에 정재면 선생이 부임합니다. 그의 부임 조건은 유교 중심이었던 명동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맹자를 만번이나 읽었던 간도의 대통령 김약연 선생이나 주역을 만번이나 읽었던 김하연 선생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재면 선생님이 학생들은 예배를 드리는데 교직자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더 이상 선생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교직자들까지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배를 들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역을 만번이나 읽었던 김하연 선생님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님을 조상처럼 섬기는데 유교에서 조상을 섬기는 일이 왜 안되느냐?” 였습니다. 그러나 이일이 계기가 되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성경을 세 번 읽은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유인즉 유교에서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나오지 않는데 성경에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교보다는 기독교가 더 높은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명동교회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물론 맹자를 만번이나 읽었던 간도 대통령 김약연 선생님은 명동 교회 장로가 되고 이후에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목사가 되어서 전도사업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언에 대하여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 라고 남겼습니다. 저도 이런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유학자였던 이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과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동양의 최고 유학자로서 서양종교라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유학자로서 과거의 삶을 버리고 믿음으로 소수의 삶을 살았기에 수많은 권능들이 나타났습니다. 관심과 편견과 믿음 없음을 넘어서서 주님의 권능들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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