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쉼이 있습니까?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1장 25-30절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행복한 추석 명절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추석 명절을 지내기에는 너무 높은 물가 때문에 서민들의 씨름만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을 살아 가는게 힘들다는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세상에서 힘들지 않고 거저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세상에 발을 밟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고스러움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자 합니다. 인생의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적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이 말하는 수고와 무거운 짐은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의도하며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수고와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그들의 삶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멀리할 때는 외세의 침략을 받는 등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는 회복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들의 삶과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전제로 이들에게 있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힘들고 고단한 삶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삶의 무거운 짐도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거운 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무게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를 힘썼지만 온전히 지킬 수 없어서 그것으로 마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시도가 있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같은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자신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던 세리나 죄인들은 그것을 매우 무거운 짐으로 여겼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못 사는데 대한 부담감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또 다른 의미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처음 받았던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쉬게 해준다는 것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해서 부담감을 느끼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저에게 쉼을 준다는 말씀은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초청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여 무거운 부담감을 지닌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버둥친 경험이 없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레마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이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내가 지고 있는 온갖 세상의 무거운 짐들을 예수님이 대신 지어 준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한 이유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멍에와 짐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멍에는 짐을 쉽게 끌고 가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짐을 수레에 싣기 위해서 만든 도구입니다. 소가 어느 정도 자라면 코를 뚫고 ‘ㄱ’ 자 모양의 나무를 소의 목에 걸고 수레를 끌게 합니다. 멍에를 매지 않고는 수레를 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무거운 짐을 잘 짊어 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결코 짐을 벗어 버리고 짐을 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세요. 무거운 짐을 벗겨주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십니다.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가 쉼을 얻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분명히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쉼을 얻을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 부분이 열쇠입니다.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문제는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스럽게 여기고 무겁게 여기는 그 짐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시각이 달라지면 무거운 짐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맡겨 편해지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쉽게 짊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무거운 짐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친한 형이 목회의 무거운 짐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에 성령님이 저에게 주시는 감동이 있습니다. 목회의 무거운 짐도 있지만 또한 그 안에 그분의 존재의 가치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 형에게 남긴 말은 “그 힘든 일 속에 형의 존재의 가치가 느껴지내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후에 그 형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힘든 것도 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로 그 형에게는 그 힘든 일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충분히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왜 주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운가?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왜 십자가의 멍에가 쉽고 가벼우냐?” 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구원을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율법을 완벽히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킨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구원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의 멍에가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힘써도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셨으니 우리의 마음에 쉼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면 내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마음의 쉼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멍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들이 “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느냐?”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힘으로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에 무거운 부담감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 때 우리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쉽고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고 내 힘으로 지켜려고 수고 할 때 힘들어서 넘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려고 힘들게 수고하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나를 인도하는 삶이 되어야 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 성경 공부를 하면서 “죽음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저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느낌이 떠올랐고, 또 하나는 편해질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에 대한 느낌은 제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할 것 같다는 마음은 지금의 목회를 하면서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목회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가면 편할 것 같다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우리 집사람은 죽음 하면 슬픔이 떠오른다고 하였습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무언가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슬픔으로 표현 될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한 다음 날 기도하면서 이후에 죽음에 대한 감정을 “지금 십자가에 대한 죽음의 감정으로 바꿀 수 없느냐” 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십자가의 죽음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면 죽은 이후에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속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매일의 삶속에서 십자가의 멍에를 짊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수고하고 무거운 삶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할 때 내 인생의 어렵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다는 이기적인 신앙에만 빠져있지 않길 소망합니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수고하여도 해결되지 않는 구원의 문제가 십자가의 멍에를 통하여 해결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지키려고 수고하여도 지키지 못하는 무거운 짐이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예수님 살 때 쉽게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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