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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누가복음 9장 46-48절/ 10월 9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10-10 추천 0 댓글 0 조회 876
2011년 10월 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가 크냐?”
설교 본문 : 누가복음 9장 46-48절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으며 애도의 물결이 넘치고 있습니다. 최근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과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화가 폴 세잔의 사과에 이어 애플의 로고인 '한입 베어먹은 모양의 사과'를 네 번째 사과로 추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잡스와 애플이 세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대변에 주고 있습니다. 미혼모에게 태어나 가난한 가정으로 입양이 되어서 학비가 없어서 대학을 중퇴할 정도로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아니하고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면서 인생역전을 이루어 낸 창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정보통신(IT)업계 가장 큰 별 스티브 잡스도 죽음만큼은 피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 아이팟, 아이폰 등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발명을 거듭해 온 잡스는 죽음조차 ‘발명품’이라고 했습니다. 2005년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지난주 췌장암과 6년 동안의 투병을 끝내고 죽음을 순종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IT 업계 가장 큰 별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보면서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의 “누가 크냐” 라는 변론이 왜 그리 공허하게 들립니까? 죽음 앞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가치는 “누가 크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 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멀기만 합니다. 서로 누가 큰지 다투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 자신들이 얻게 될 자리와 권력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더 큰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에 예수님의 마음과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 다음에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하고 변론하는 모습을 오늘날에 적용하면은 부모의 임종을 앞두고 유산 다툼을 하는 패륜아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고 변론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동등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섬김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 의에서 나오는 섬김과 성령의 섬김이 있습니다. 자기 의에서 나오는 섬김은 계산하고 계획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성령의 섬김은 거룩하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내적인 촉구에 의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서 나오는 섬김은 외적 상급을 원합니다. 자신이 한만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합니다. 성령의 섬김은 숨은 섬김을 만족해하며 사람의 주목도 관여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자신이 섬김의 대상을 선택하며 자신의 기분에 좌우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섬김은 섬김의 대상에 차별이 없으며 성실하게 섬기며 섬김 자체로 만족을 합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공동체에 금이 가게 하지만 성령의 섬김은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웁니다. “누가 크냐?” 라는 제자들의 변론에 그들의 발을 씻는 섬김의 본을 보여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누가 크냐?”고 변론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보여주고 말하기(show & tell)입니다. 짐승 중에 코뿔소는 수놈끼리 만나면 먼저 코뿔을 대봅니다. 하마는 입을 쩍 벌려 입 크기를 대봅니다. 공작은 꼬리 깃을 활짝 펴서 깃털이 얼마나 화려한가 대봅니다. 이러한 동물적인 본성이 인간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저 사람이 큰가, 내가 큰 가 재봅니다. 이런 세상의 문화가 교회까지 들어와서 교회의 직분이 서열화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제자들이 왜 직분을 세웠는지 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 의 서열 문제로 집사라는 직분이 생긴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일들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역할을 분담하기 위하여 집사의 직분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서열화 될수록 변질되고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서열의식을 십자가에 못 밖을 때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도 오직 ‘큰 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린아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합니다(48절). 즉 어린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며 관심도 갖지 않는 하찮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득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줄을 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 자들을 향한 섬김이 가장 큰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 도와줘도 나올 것이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나누는 자가 진정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관심 없는 존재들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인 줄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고 합니다(48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상하도치 원리입니다. 몇 년전 소천하신 김준곤 목사님은 “바구니의 사과는 헤아릴 수 있어도 사과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이 품고 있는 사과는 헤아릴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작은 것에 큰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즉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작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작은 것들 속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눅 16:10).

우리가 작은 자로 살면서도 또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섬김을 선택하는 것과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섬김을 선택할 때 우리는 여전히 누구를 섬길지, 언제 섬길지에 대해 우리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되기를 선택할 때는 자신의 결정권을 포기하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바울이 서신을 보내면서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소개하고 있는지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저명인사가 죽으면 어떤 사람들이 찾아오고 누가 조화를 보냈느냐? 로 언론에서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라고 변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로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의 주인공 안수현씨입니다. 안수현씨는 군의관이었는데 33살의 젊은 나이에 유행성 출혈열로 죽게 됩니다. 그의 장례식장에 수많은 의사들, 간호사들과 군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환자들과 미화부, 구두 닦는 사람, 식당 아줌마들까지 대거 포함하여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 4,000여명 이상이 추도했습니다. 안수현씨는 세상 기준으로는 바보 의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큰 병원을 개원하여 성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바보 의사였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과 무시하기 쉬운 구두닦이, 식당주방 아줌마, 미화부등 그들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영접하고 겸손히 섬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죽었을 때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까?” 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유명한 사람들보다 바보 의사 안수현씨를 추모했던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죽음이 더 예수님을 따랐던 삶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관심 받지 못한 영혼들을 영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삶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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