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세상의 소금과 빛
설교 본문 : 마태복음 5: 13-16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중국 선교를 위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며 감동을 준 말이 있습니다. 독일 신학자 에밀 브룬너의 "불은 타오름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동이 제 마음속에서 계속 타오르기를 소망합니다. 중국 지하교회 신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의 주제가 “전도”이다 보니 준비할수록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전도가 금지된 나라에서 “전도에 대해서 어떤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더욱 더 저를 짓눌렀습니다. 물론 저 같은 초짜가 겪는 어려움이겠지요. 결국 전도를 성령의 권능으로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원리이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먼저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됩니다. 지난날 성령 충만할 때는 의욕과 열심히 앞서다 보니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 충만하더라도 온유하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주 금요일 저녁 기도회에서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데 “화평케 하라”는 강한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케 할 때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역할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변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이해를 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해석들이 소금과 빛에 대하여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적인 측면에서 소금과 빛에 대한 의미를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소금과 빛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의 삶의 대하여 도덕적, 윤리적인 선한 행실로 해석해 왔습니다. 저 역시 소금에 대한 해석을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는 존재, 또는 맛을 내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빛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는 빛으로 살자”고 해석하였습니다. 이런 해석들이 그리스도인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삶의 해석에만 치우치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으로 치우치는 이유는 16절에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도덕적인 의미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행한 착한 행실은 착한 행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가니”라는 영화에서 인하학교가 장애인들을 돌보는 착한 행실은 참된 착한 행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인간은 참된 의미의 착한 행실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착한 행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존재가 변화된 이후에 나오는 것이 진정한 착한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함없이 나오는 착한 행실은 참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를 성찰할 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는 존재론적 측면이고 나중은 역할론적 측면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소금과 빛이 도덕적인 해석으로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 때 올 바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를 확실히 할 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말씀의 착한 행실은 도덕적 기준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된 다음에 나타나는 착한 행실인 것입니다.
2. 성경적으로 “세상의 소금” 의미
이제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먼저 존재론적 측면에서 세상의 소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존재론적 측면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소금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소재였습니다. 소금은 수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소금으로 남아있습니다. 소금의 맛도 수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짠맛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를 하나님의 언약에 적용하면은 세상은 세월이 흘러 변화되어 갈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소금의 의미를 존재론적 측면과 연결하여 보면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에서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변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언약의 말씀은 결코 변화되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소금 언약처럼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은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세상의 소금으로서 역할론적인 측면입니다. 성경적으로 소금의 역할은 자신이 죽어야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물 근원이 좋지 못한 샘에 소금을 뿌려서 물 근원을 고쳤습니다(왕하2:21). 물 근원이 나빠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거기에 뿌려지니까 소금이 대신 죽고 물 근원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라는 역할은 너희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죽어서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라는 뜻입니다. 소금의 세상의 역할이 십자가 사랑의 역할과 동일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 남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소금의 역할인 것입니다.
3. 성경적으로 “세상의 빛”의 의미
소금에 이어서 세상의 빛에 대하여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는 해석을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틀린 해석이 아니라 도덕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반사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빛은 원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연결하여 “세상의 빛”에 대하여 존재론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존재는 어둠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존재가 소경이요, 죄인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예로 바울이 변화되기 이전에 어둠의 소경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최고의 가문과 최고의 공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소경인줄 모르고 그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그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했을 때 자신이 소경인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대면하기 전에는 자신이 소경인줄 모릅니다. 정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만이 자신이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빛”에 대하여 역할론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빛에 대한 역할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는 분별입니다. 어떤 분별입니까? 어느 것도 숨길 수 없는 분별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합니다(14절).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숨기지 않고 드러나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정 반대의 역할을 합니다. 죽어있는 나무가 태양 아래에서 심하게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태양 때문에 죽은 나무가 시들어 간다고 탓을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 나무가 생명이 있었다면 빛으로 인하여 성장하고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태양의 빛은 죽어있는 것에는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성장과 열매를 가져옵니다. 우리 영혼 안에 생명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장하며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소금과 빛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소금과 빛은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소금과 빛은 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대하여 소리 내어 자랑하지 않습니다. 소금과 빛은 자신들의 역할을 묵묵히 행함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세 번째로 소금과 빛은 외양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입니다. 소금과 빛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여 밖을 향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소금과 빛은 자신들을 희생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금도 자신을 녹이는 희생을 통하여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빛도 자신을 태우는 희생을 통하여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교인들이 존재가 변화되지 못한 채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극히 육신적인 모습이 드러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할만 앞서서는 안 됩니다. 역할만 앞세우면 도덕적인 측면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의 존재로 변화 되면은 자연스럽게 착한 행실의 역할을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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