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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을 주의하라! / 마가복음 8장 14 - 25절/ 10월 23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10-23 추천 0 댓글 0 조회 573

2011년 10월 2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룩을 주의하라!

설교 본문 : 마가복음 8장 14-25절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0. 들어가는 글

'1%대 99%'의 저항 운동이 세계 도처에 번지고 있습니다. 미국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1%대 99%' 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벌리고 있습니다. 99%의 서민들이 1%의 부자들에게 저항하는 운동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두가 함께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라 세계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일어난 일도 전 세계를 향하여 누룩처럼 급속히 번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죽 속에서 작용합니다. 나중에는 반죽을 크게 부풀게 합니다. 반죽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반죽 전체를 변하게 합니다. 누룩은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좋은 뜻으로도 나쁜 뜻으로도 쓰입니다. 긍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천국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오늘 말씀에서는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칠병사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떡이 일곱 광주리나 남았는데 그 떡을 그냥 놓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고하는 어조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15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의 삶에 적용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바리새인들의 누룩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룻의 누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누가복음에서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고 정확히 말씀하십니다(눅12:1). 바리새인의 누룩은 바로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을 외식으로 지칭하셨습니다.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크리노마이’는 “가면을 쓰다” 라는 말이며, 명사형 ‘휘포크리테스’는 연극배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외식이 왜 문제가 됩니까? 물론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직업상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실제가 아님을 밝히고 하는 것이기에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외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외식은 실제라고 하면서 실제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에 이것은 아주 가증스러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외식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을 누룩, 회칠한 무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에 비유하시면서 매우 분노하시며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청년이었던 한 자매가 자신이 교회만 오면은 연극을 하는 것 같아서 괴롭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의식한 결과입니다. 좀 더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말씀의 거울 앞에 바로 서 보길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시적인 보상을 얻고자 하늘에 영원한 보상을 잃어버리는 영적인 근시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의 동기가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제 자신도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목회하면서 겉과 속이 다르게 외식하는 분분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이번 중국 선교를 준비하면서도 너무 드러내지 않아나 하나 부분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제가 초짜라서 그런 것입니다. 또한 성도님들의 기도가 필요하고요.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제 중심입니다. 제 중심이 제 겉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하는 것들에 대하여 제 중심이 다르지 않다면 상급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책망은 받지 않으리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2. 헤롯이 누룩

이제 헤롯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혹자는 인생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으로 연결시켜보고자 합니다. 헤롯의 누룩이란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의 말씀 듣기를 좋아하였지만 결국 사람들의 요구에 세례 요한을 죽이는데 내어준 사건을 연상시킵니다(막6:14-29).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도 로마의 권력아래서 유대 종교를 인정하면서 성전을 지어주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헤롯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결국 세상으로 가버리는 연약한 신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은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고전3:1). 그리고 C.C.C 의 4영리를 공부하다 보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유진 피터슨과 존 맥아더의 글을 보면서 생각이 다라졌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의 상태라는 것입니다(고전3:1). 그러므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영적 상태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화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예전과 지금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금식을 하더라도 제 자신의 문제만을 가지고 금식했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선교만을 위해 금식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작은 예수가 되어서 주님을 닮아가는 성숙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3.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이 떡 일곱개로 칠천명을 먹이시고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실 때에 제자들이 남은 떡을 가져오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교훈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관심은 육신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맹인이 2단계에 걸쳐서 눈뜬 장면을 보여줍니다(22-25절). 맹인이 처음 눈을 떠을 때는 사람을 나무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24절). 눈뜬 맹인이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 역시 아직도 주님에 대해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첫 단계의 눈만 떠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뜬 맹인이 사람을 나무처럼 바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바라본 것입니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대로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젖만 먹는 어린아이 신앙인 것입니다.


눈뜬 맹인이 다시 한 번 주님께 안수를 받고 사람을 바로 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처음과 두 번째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목하여” 라는 것에 있습니다(25절).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선입관을 내려놓고 주목하여 바르게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2단계의 신앙으로 넘어가서 주님을 주목하여 바르게 바라보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더 바라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 역시 주님만 주목하여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바로 보았음을 인정합니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하나만 예로 든다면 주일날 예배 시간에 참석 숫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많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그 마음으로 설교하면 화난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과 비슷했겠지요. 언제부터가 주님만 주목하여 바라보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정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 근심과 염려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만 주목하여 바라보면 감사와 평안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상태가 첫 번째 눈만 뜬 육신적인 상태가 아니라 두 번 눈을 뜨고 주님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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