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아브라함에게 임한 복
설교 본문 : 창세기 12장 1-8절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0. 들어가는 글
깊어지는 가을 그러나 떨어지는 낙엽 속에 한해의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성숙자반>이라는 책에서 복을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하는 말에 공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자동차를 구입한 사람이 메이커의 애프터서비스가 전혀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 자동차와 메이커를 동시에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의 복이 필요 없다” 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은 중요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기복주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매일 정비소에 가서 애프터서비스 받는 재미로 자동차를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비소에 가서 애프터서비스를 받는 이유는 자동차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안에서 내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복의 모델로 제시한 믿음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으로 복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동일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누구를 따르는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4절 말씀에서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 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 하나님이 들려준 약속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영적인 비결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복의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는 본래 세리였습니다. 세관에 세리들이 주욱 앉아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마9:9). 예수님 곁에는 베드로가 서 있었습니다. 초라한 베드로의 옷차림을 보면 가난한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리들은 예수님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단 한 사람, 마태만이 초라한 몰골의 예수님임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 한 사람에게만 다가가서 귀속 말로 “나를 따라올래?”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따라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모두가 따라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들은 대로 따라서 살고자 하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분에서도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다”고 증언합니다(4절).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롯은 사람을 따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따라가면 실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중국 선교를 갔을 때 말씀이 아닌 것들이 너무나 중국 교회를 혼란케 만들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혼란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감으로 주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누구에게 예배드리는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절망적인 심정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을 원망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준다고 해서 이미 살고 있는 좋은 땅 다 버리고 순종하여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도착해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고 증언합니다(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은 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현실은 땅 한 평도 주지 않아서 나그네 삶을 살면서 옮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낭패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귀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현찰을 주시지 않습니다. 항상 약속어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도 바로 현찰로 주시지 아니하고 약속어음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약속어음이 부도가 나지 아니하고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하여”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7절과 8절 말씀에 반복적으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전에 보았던 개혁 한글판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고 나옵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땅 한 평 주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실망을 했으면 했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드리기가 힘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실에서는 응답이 없는데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인생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진정 하나님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하는 믿음을 보시고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복이 히브리어로 ‘바라크’ 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창대함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복은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너무도 창대해지거나 바빠져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시간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께 더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의 일생이 여호와를 위하여 무릎을 꿇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3. 누구와 교제를 나누는가?
이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가축이 많아져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해 주신 땅임에도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습니다. 롯은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조카 롯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발길이 닿는 땅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땅 한 평이라도 더 발길을 닿게 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고 증언합니다(창13:8).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마므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지명이기도 하지만 ‘교제의 자리’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므레’는 ‘뜨거운’ 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넓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믿음의 바른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뜨겁게 나누는 최고의 교제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는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건강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자녀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모르는 분이 여기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때로는 원망이나 불평을 하면서 피하거나 숨으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 현실을 수용하는 순종을 하면서 믿음으로 뚫고 나갈 때 무엇인가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차적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주어진 상황은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그 상황을 수용하는 순종을 통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통하여 뚫고 나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개척 교회의 사명에 순종하여 김포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제가 원하는 상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을 순종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뜨겁게 기도로 교제하며 뚫고 나갔을 때 저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수용하는 순종을 하면서 하나님과 뜨거운 기도의 교제를 나누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잘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뜨거운 교제를 통하여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믿음으로 승리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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