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은혜위에 은혜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 12-17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화요일 월드비전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교파를 초월하여 각 지역 목사님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였습니다. 한 테이블에 열 명씩 앉아서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제가 세습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하자 그것은 전혀 문제점이 되지 않는다고 외면을 당했습니다. 오히려 세습을 해야지 교회가 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목사님이 “평신도가 세상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다.” 고 하자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래서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생겨난 것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죄인 된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의인들보다 죄인들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팔은 안으로만 굽을 수 없고, 가재는 게 편일 수 없고, 초록은 동색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에 오늘도 예수님을 더 닮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속에 담긴 깊은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영광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있다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14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이 최고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보여주신 은혜 속에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그 자체가 영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본질적인 영광이시고, 영광은 예수님의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의 삶이 영광이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우리 자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은 일정부분 가능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무언가 답을 줄 수 있는 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이 1940년대에 공산화가 되면서 교회 진멸에 열을 올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국 교회는 아직 자립할 만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 정부는 가정 교회를 금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불법화했습니다. 목사와 성경 교사를 옥에 가둬 고문했습니다. 추방당한 선교사들은 속수무책으로 가슴만 치고 있었습니다. “중국 교회는 선교사 없이 과연 어떻게 될까?”, “선교사가 이끌던 신학교와 성경 대학, 문서와 교육 과정, 성경 인쇄 능력이 없어도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1980년대 들어 중국의 문이 열릴 때까지 40년 동안 선교사들은 중국의 상황에 대하여 궁금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추방당한 40년 후의 중국 교회는 성령의 친히 역사하심을 통하여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 냈습니다. 1940년대 선교사님들이 추방당할 때 중국 기독교 인구가 75만 명이었는데 1980년대에 문이 열려서 들어가 보니 삼천오백만 명이 된 것입니다. 묘한 일이지만 중국공산정부의 억압이 오히려 중국 교회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권력 구조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본연의 사명인 예배와 전도에 힘썼을 뿐 정치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일에 집중한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도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삶을 바꾸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법과 거룩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법으로 간음은 금할 수 있으나 정욕은 막을 수 없습니다. 법으로 절도는 금할 수 있으나 탐심은 막을 수 없습니다. 법으로 사기는 금할 수 있으나 교만은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삶으로 변화될 때 정욕과 탐심과 교만을 다스리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14절). 저는 진리보다 은혜가 먼저인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먼저 진리의 잣대로 우리를 평가했다면 우리가 한 행위로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다루시기에 죄인 된 우리들이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17절 말씀에서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에 이어서 은혜와 진리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은 우리의 위선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속사람의 모습은 감추고 겉 사람의 모습만 치중하다보면 그만큼 위선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처럼 설교하는 사람들이 실제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려는 위선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이자 즉시 벌을 받은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는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기사입니다. 이 부부는 아중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팔아 그 돈의 상당량 교회에 바쳤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잘못한 게 있었습니다. 더 영적으로 보이고 싶어 땅값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신앙을 거짓으로 꾸민 셈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즉시 벌을 내리는 것을 보면은 위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선의 해결 방법은 완벽 아니면 정직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완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회개에 이르는 정직입니다. 성경이 말하듯 하나님의 은혜는 살인, 외도, 배반 등 어떤 죄든지 다 덮을 수 있습니다. 회개에 이르는 정직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에 이르는 정직함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위선에 사로잡힌 삶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거짓되게 살면서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영적인 사람처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 자신이 덜 영적으로 보이더라도 정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무능하게 보일지라도 회개에 이르는 정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 머무르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들은 은혜위에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은 은혜와 진리를 증언한 다음 “은혜 위에 은혜러라” 라를 통하여 은혜를 더욱 강조합니다(16절). 저는 “은혜 위에 은혜는 무엇일까?” 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감동은 은혜 위에 은혜가 바다의 파도처럼 다가왔습니다. 은혜는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어서 하나가 오면 다른 하나가 또 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파도처럼 지극히 넘치는 것으로 결코 멈춤이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파도 속에 살아야 합니다. 은혜의 파도 속에 살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은혜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면 진리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성자라고 불리는 시몬느 베이유는 중력과 은혜라는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중력은 모든 물체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내부에도 중력과 같은 똑 같은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중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은혜의 법칙입니다. 중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자 하는 믿음은 진정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중력의 힘으로 하려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중력의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주님을 찾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중력의 힘을 통하여 내 의도대로 성도님들을 끌어당기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중력의 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은혜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니 너무나 흠투성이인 저를 벌써부터 사랑하고 계심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웃을 대할 때도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만 그것까지도 사랑하시는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저에게 은혜의 렌즈로 바라볼 수 있도록 감동을 준 글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보다 죄인을 가까이 하십니다. 어느 강사가 은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줄에 매달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시고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계속 줄을 끓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묶어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 이제는 중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삶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은혜 위의 은혜로 우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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