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손과 발
설교 본문 : 잠언 31: 30-31절/ 947쪽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렸듯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고 이중표 목사님의 사모님인 안경애 사모님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임종하실 때 “할렐루야!”를 고백하시며 임종하셨습니다. 이에 화답하듯이 사모님은 “아멘, 아멘”을 두 번 고백하시며 임종하셨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촬영한 동영상에서 “저는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장례식의 모든 과정 속에 가장 크게 남는 감동은 아들 이광선 목사가 어머니에 대하여 회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광선 목사는 어머니를 떠올리면 “희생”이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도사처럼 사신 아버지 이중표 목사님을 위해 수녀 아닌 수녀처럼 한평생 희생하셨고, 또한 교회의 잘됨을 위해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한 평생 희생하시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고 안경애 사모가 아들 이광선 목사에게 병상에서 유언처럼 남긴 말은 “교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종이 되라”고 하였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제 자신도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성찰해보았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희생을 가장 기뻐하시는지 살펴보면서 실천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희생 중에 가장 귀한 희생은?
우리의 몸으로 표현하는 희생 중에 어떤 희생이 가장 귀한 희생일까요? 우리의 중심은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말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은 우리의 중심과 다르게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습니다. 제일 쉬운 것은 말의 위장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표정이나 몸짓으로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표정이나 몸짓으로도 얼마든지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표정이나 몸짓도 우리의 중심과 다르게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손과 발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손과 발에 의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한 사람의 중심이 진실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손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잠언은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증언해 줍니다(31절).
우리의 중심을 손발에 표현한 가장 진실된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란 작품입니다.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뒤러는 그림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역시 화가의 꿈을 가진 한스를 만나 함께 하숙을 하며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가난했으며 돈벌이를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 했기에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한스는 “뒤러야, 네가 먼저 그림을 배워라. 내가 돈을 벌어서 너를 돕겠다. 나중에 네가 성공해서 그림이 잘 팔리면 나는 그때 그림 공부를 하도록 할게” 라고 말 했습니다. 뒤러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한스는 진심으로 권했고, 뒤러는 그림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한스는 고생고생을 해가며 돈을 벌어서 뒤러의 학비를 댔습니다. 공부에 전념한 뒤러가 학교를 마칠 때쯤,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뒤러가 한스를 위해 뒷바라지를 할 차례였습니다. 연락 없이 한스를 찾아간 뒤러는 그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제 친구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그림이 팔리는 화가가 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려버려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지만, 뒤러는 앞으로도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한스의 기도에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뒤러는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렸지만 자신을 위하여 주님 앞에 모아진 한스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 <기도하는 손>이 바로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한스의 손입니다. 사람의 손이 하는 일 중에 기도하는 손이 가장 거룩한 손이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손이 가장 가치가 있는 위대한 손이라고 믿습니다.
2. 균형 잡힌 희생
우리는 기도하는 손과 희생하는 손을 비교하면서 “어느 손이 더 위대할까?” 에 대한 논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논쟁이 바로 성경 속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눅10:38-42).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고 경배함으로써 예배에 치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정성껏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섬김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면 둘 중 누가 더 바람직한 인물일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고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마리아 편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편”의 “좋은”은 비교급이 아니라 형용사가 쓰였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 쓰였다면 마르다와 비교하여 마리아가 더 좋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형용사가 쓰였기 때문에 마리아 편도 좋고, 마르다 편도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른 것을 통하여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눅10:41). 사실 우리들이 어떻게 마리아처럼 하루 종일 말씀만 듣고 살 수 있습니까? 실제로는 마르다처럼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예배와 마르다의 섬김 중에 “어느 편이 더 좋으냐?”의 답은 둘 중 한 명이 아니고,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섬김의 균형을 추구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만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섬김은 이웃을 향한 긍휼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만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이웃을 향한 긍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마리아의 예배의 영성과 마르다의 섬김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을 통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수직적인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마르다의 수평적인 인간을 향한 섬김의 균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뒤러가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친구 한스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 속에도 옥합을 준비하기까지 헌신했던 마르다의 섬김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김포한신교회가 개척하여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처럼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마르다처럼 손과 발이 되어서 섬기는 희생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예배의 영성과 마르다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는 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3. 주님은 손과 발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예배의 영성과 섬김의 영성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을 전제로 한국 교회가 예배의 영성에만 너무 치우쳐 있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손발을 통한 섬김의 영성을 강조함으로 균형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4:19). 사람 낚는 어부는 전도자를 의미함에도 “내가 너희를 전도자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부가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고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과 발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의 문이 막혀있다면 교인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손과 발을 사용하여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증언합니다(요1서3:18). 주님께서 우리의 손과 발이 얼마나 진실하게 행하였는지를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너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형벌을 받으신 곳이 손과 발입니까? 인간의 범죄가 손과 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우리의 손과 발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과 발을 대신하여 우리들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사랑을 증명하기 주님의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물든 우리들의 손발을 물로 씻을 수 없었기에 주님의 손발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입술로 한순간 말하고 일평생 손발로 증명하는 삶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한번쯤 모두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니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고백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며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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