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가? / 민수기 12:1~10절 / 12월 4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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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가?
설교 본문 : 민수기 12:1~10절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0. 들어가는 글
12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더욱 더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 합니다(시119:7).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심령이 메말라가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제가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제 근처에 잘 오지를 않습니다. 괜히 서러워집니다. 아픈 것도 힘든데 가족들까지 저를 멀리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 서글퍼집니다. 아플 때 저를 멀리하는 이유는 항상 똑같습니다. 제가 예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느낌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고난이 저에게 메마름을 주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메마르다보면 자기에게 집중하는 강도가 강해집니다.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자기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사람을 폐쇄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고난에 함몰된 사람은 하나님도 메마른 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고난이 너무 심하면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신 차가운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메말라진 심령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깊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은혜의 수분을 흡수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비방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비방 속에서 어떻게 승리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비방과 하나님의 등장 사이에...
오늘 말씀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문제는 구스 여자를 취한것 때문입니다(1절).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 를 통하여 모세에 대한 비방의 원인이 단순히 이방여인과의 혼인 때문이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게 없다는 말로서 이스라엘에 공동체에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비방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속에는 항상 비교의식과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변호해주고 있습니다(4절).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변호해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비방과 하나님의 등장 사이에 바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는 것입니다(3절). 그들의 비방으로 궁지에 몰린 모세에 대하여 탁월한 온유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온유함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변호를 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함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드럽고 친절한 성품에 대하여 온유하다고 합니다. 사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모세가 부드럽고 친절한 온유를 보여주었어도 거의 성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온유함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이 말하는 온유함은 헬라어의 형용사로 프라우스, 명사로는 프라우테스입니다. 이것은 야생동물의 거친 성격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거친 야생동물을 조련사가 훈련시키면 야성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을 위해서만 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마구간에서 태어나 훈련받은 말보다는, 훈련받은 야생마가 더 값이 있습니다. 훈련된 야생마는 그 강한 성격을 주인만을 위해 사용하기에, 뛰어가라고 주인이 박차를 가하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 속으로도 뛰어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더 달리고 싶어도 주인이 고삐를 당기면 즉각 그 자리에 멈추어 섭니다. 이것이 바로 프라우테스의 온유함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에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이 찬양의 가사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프라우테스의 온유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유는 철저하게 주인을 위한 성품이기에, 때론 산들바람처럼 부드럽지만 때론 폭풍처럼 거세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핍박하던 야생마와 같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야생마 같던 바울이 주님께 사로잡혀 조련되고 나니, 주님을 위해 참수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온유함인 것입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형제이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혈육이더라도 자신을 향한 비방에 대하여 징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성격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다리며 하나님께 맡길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을 위해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민12:13). 자신의 성격이 주님께 길들여지는 온유함 없이는 비방한 사람을 용서하며 기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온유한 성격이 되어서 하나님이 편들어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온유함은 충성됨과 쌍둥이입니다.
야생마와 같은 사람이 주님의 조련으로 길들려진 온유함은 반드시 충성됨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 대하여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합니다(7절).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에 비하여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충성됨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모세의 충성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온 집”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인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충성의 가치가 낮아진 시대입니다. 충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방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높이 평가받는 분위기 입니다. 비방과 비판은 수술할 때 쓰는 메스와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술용 칼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비판보다도 충성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충성은 통상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걸 성실이라 합니다. 타인에게 충성하는 걸 의리라 하고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성실과 의리와 믿음이 결합된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성실과 의리와 믿음이 결합된 충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충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해를 요구합니다. “왜 주님께 충성하지 못하느냐?” 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요, 실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들 돌봄에 있어서 이해가 되어서 그렇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자녀를 키우고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합니다(고전4:2). 여기서 ‘맡은 자’의 원뜻은 “배 밑에서 노 젖는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배 밑에는 노 젖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노를 저어 충성했습니까?”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이순신 장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여 노를 저은 것입니다. 진정한 충성은 이해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인정을 넘어서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스런 사람은 누가 인정해서 하고, 아니면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바울도 충성을 다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충성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갈1:10). 사도 바울은 사람의 인정을 구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참된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충성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이길 것 같지만 하나님이 편들어주시는 사람이 반드시 이깁니다. 하만과 모르드개가 경합할 때 힘은 하만이 엄청나게 셌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편들어주신 모르드개가 이겼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합할 때도 야곱이 자기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편들어 주셔서 이긴 것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이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사울왕은 다윗보다 수십 배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편들어 주시는 다윗을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전세가 불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링컨에게 한 참모가 와서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에 계실까요, 남군 편에 계실까요?”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링컨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가, 적의 편에 계신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네. 오직 나의 고민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나 하는 것이네.” 우리가 진정 온유함과 충성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바울처럼 온유함과 충성됨을 주님께 보임으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설교 제목 : 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가?
설교 본문 : 민수기 12:1~10절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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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더욱 더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 합니다(시119:7).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심령이 메말라가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제가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제 근처에 잘 오지를 않습니다. 괜히 서러워집니다. 아픈 것도 힘든데 가족들까지 저를 멀리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 서글퍼집니다. 아플 때 저를 멀리하는 이유는 항상 똑같습니다. 제가 예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느낌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고난이 저에게 메마름을 주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메마르다보면 자기에게 집중하는 강도가 강해집니다.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자기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사람을 폐쇄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고난에 함몰된 사람은 하나님도 메마른 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고난이 너무 심하면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신 차가운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메말라진 심령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깊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은혜의 수분을 흡수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비방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비방 속에서 어떻게 승리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비방과 하나님의 등장 사이에...
오늘 말씀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문제는 구스 여자를 취한것 때문입니다(1절).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 를 통하여 모세에 대한 비방의 원인이 단순히 이방여인과의 혼인 때문이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게 없다는 말로서 이스라엘에 공동체에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비방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속에는 항상 비교의식과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변호해주고 있습니다(4절).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변호해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비방과 하나님의 등장 사이에 바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는 것입니다(3절). 그들의 비방으로 궁지에 몰린 모세에 대하여 탁월한 온유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온유함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변호를 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함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드럽고 친절한 성품에 대하여 온유하다고 합니다. 사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모세가 부드럽고 친절한 온유를 보여주었어도 거의 성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온유함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이 말하는 온유함은 헬라어의 형용사로 프라우스, 명사로는 프라우테스입니다. 이것은 야생동물의 거친 성격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거친 야생동물을 조련사가 훈련시키면 야성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을 위해서만 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마구간에서 태어나 훈련받은 말보다는, 훈련받은 야생마가 더 값이 있습니다. 훈련된 야생마는 그 강한 성격을 주인만을 위해 사용하기에, 뛰어가라고 주인이 박차를 가하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 속으로도 뛰어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더 달리고 싶어도 주인이 고삐를 당기면 즉각 그 자리에 멈추어 섭니다. 이것이 바로 프라우테스의 온유함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에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이 찬양의 가사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프라우테스의 온유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유는 철저하게 주인을 위한 성품이기에, 때론 산들바람처럼 부드럽지만 때론 폭풍처럼 거세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핍박하던 야생마와 같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야생마 같던 바울이 주님께 사로잡혀 조련되고 나니, 주님을 위해 참수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온유함인 것입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형제이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혈육이더라도 자신을 향한 비방에 대하여 징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성격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다리며 하나님께 맡길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을 위해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민12:13). 자신의 성격이 주님께 길들여지는 온유함 없이는 비방한 사람을 용서하며 기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온유한 성격이 되어서 하나님이 편들어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온유함은 충성됨과 쌍둥이입니다.
야생마와 같은 사람이 주님의 조련으로 길들려진 온유함은 반드시 충성됨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 대하여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합니다(7절).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에 비하여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충성됨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모세의 충성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온 집”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인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충성의 가치가 낮아진 시대입니다. 충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방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높이 평가받는 분위기 입니다. 비방과 비판은 수술할 때 쓰는 메스와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술용 칼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비판보다도 충성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충성은 통상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걸 성실이라 합니다. 타인에게 충성하는 걸 의리라 하고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성실과 의리와 믿음이 결합된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성실과 의리와 믿음이 결합된 충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충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해를 요구합니다. “왜 주님께 충성하지 못하느냐?” 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요, 실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들 돌봄에 있어서 이해가 되어서 그렇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자녀를 키우고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합니다(고전4:2). 여기서 ‘맡은 자’의 원뜻은 “배 밑에서 노 젖는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배 밑에는 노 젖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노를 저어 충성했습니까?”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이순신 장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여 노를 저은 것입니다. 진정한 충성은 이해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인정을 넘어서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스런 사람은 누가 인정해서 하고, 아니면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바울도 충성을 다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충성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갈1:10). 사도 바울은 사람의 인정을 구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참된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충성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이길 것 같지만 하나님이 편들어주시는 사람이 반드시 이깁니다. 하만과 모르드개가 경합할 때 힘은 하만이 엄청나게 셌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편들어주신 모르드개가 이겼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합할 때도 야곱이 자기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편들어 주셔서 이긴 것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이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사울왕은 다윗보다 수십 배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편들어 주시는 다윗을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전세가 불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링컨에게 한 참모가 와서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에 계실까요, 남군 편에 계실까요?”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링컨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가, 적의 편에 계신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네. 오직 나의 고민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나 하는 것이네.” 우리가 진정 온유함과 충성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바울처럼 온유함과 충성됨을 주님께 보임으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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