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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라” / 고린도 전서 15장 1-10절 / 12월 18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1-12-20 추천 0 댓글 0 조회 1030

2011년 12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하나님의 은혜로라”

설교 본문 : 고린도 전서 15장 1-10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0. 들어가는 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교회마다 거리마다 성탄 불빛들이 요란합니다. 저는 교회의 화려하고 요란한 성탄 불빛이 늘 마음에 걸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지난주에 ‘진광불휘’(眞光不煇)라는 고사 성어를 만났는데 제 가슴속에 정말 깊이 다가왔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煇)는 ‘참된 빛은 요란하게 번쩍이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성탄의 요란한 불빛과 너무 대조가 되는 고사 성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빛은 요란한 빛이 아니라 참된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드러내고자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참된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수록 자신을 드러내고자 요란하게 반짝이는 빛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질수록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참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반짝이는 성탄의 불빛들을 보면서 지내는 지금 우리는 진정 은혜의 빛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대림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은혜가 깊어지면 생각이 변화된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바울의 부활 신앙을 성경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 고백을 한 이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여주는 은혜의 빛은 은은하며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요란한 빛일수록 깊이가 없고 속이 훤히 비추입니다. 그 결과로 요란한 빛은 열매가 나타나지 않지만 은혜의 빛은 깊어질수록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 열매는 바로 생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 고백합니다(8절). 사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맨 나중”은 꼴찌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꼴찌로 주님을 만난 것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지면 부정적인 일도 감사한 일로 바꾸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삶속에 분명 화가 나는 일인데 때로는 생각이 바뀌면 감사하는 일이 되는 경우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후 예루살렘 교회가 전도의 불이 붙어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불이 식어지자 바로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웠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썩여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개척하여 시작한 교회라서 갈등도 있고, 부족함도 있고, 어떤 한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라고 합니다(행11:23). 개척하여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많은 문제가 있을 텐데 주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바나바의 모습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은혜가 깊은 사람은 은혜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은혜가 깊지 못한 사람은 부정적인 것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은혜가 없어서 “부정적인 것만 바라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나바처럼 생각이 변화되어 “은혜만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사람입니까?” 은혜의 깊이가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2. 은혜가 깊어지면 낮아지게 한다.

은혜가 깊어지면 연이어서 나타나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다고 하면서 겸손히 낮아지지 못한다면 진짜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지만 “가장 작은 자라”고 낮추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라 칭함을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를 통하여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9절). 은혜가 깊지 못하다면 이런 겸손한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 주님의 긍휼하심을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더라도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이때 아버지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긍휼한 마음으로 돌아온 탕자를 대합니다. 탕자의 회개와 아버지의 긍휼이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 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약함이 있어도 감추고 살거나 아니면 외면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 상항이 닥치며 자신의 약한 부분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집에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약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됩니다. 신학을 하면서 목회자가 되고자 할 때 저를 가장 힘들게 한 부분이 “과연 자격이 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괴로워했던 저는 대학 시절에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전공이 시학이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종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목회자로 자격이 없다는 마음에 짓눌려 있던 어느 날 찬송을 부르다가 통곡하며 운적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이 저를 겸손히 낮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약점이 많은 저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쓸데없는 자를 구속하여 주신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3. 은혜가 깊어지면 더 많이 수고한다.

세상에는 헛된 것이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한 것"에 대하여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10절).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이 수고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다는 고백을 합니다. 저는 솔직히 이 말씀을 통하여 진심으로 올 한해 교회를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한 성도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특별히 몸이 불편한 분들이 교회를 위해 그 어려움을 감내하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은 "꼭 이렇게까지 성도님들을 힘들게 하면서 목회를 해야 하는가?" 라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라도 더 많이 수고한 분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가지고 목회자의 편의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책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자책이 들자 설교를 다시 수정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더 많이 수고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수고와 은혜는 상반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수고와 은혜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 설명을 위하여 농부의 수고를 떠올려 보고자 합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돌보는 수고 없이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이처럼 수고했다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수고한 것보다 더 큰 수고가 있어야만 풍성한 수확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적당한 비가 내려야 하고, 일조량도 맞아야 하고, 자연의 재앙으로부터도 피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하여 농부는 어떤 수고나 값을 치룬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값없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에 은혜의 수고가 더 해져야만 풍성한 수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수고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수고가 더해질 때 정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많이 수고했지만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수고가 없었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수고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를 자랑하며 삽니다. 결코 우리의 힘만으로 수고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수고가 있어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처럼 많이 수고했을지라도 진정 은혜의 수고를 아는 자들이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10절). 우리의 수고하는 인생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수고가 더해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들이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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