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설교 본문 : 사도행전 27장 11절 - 22절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0. 들어가는 글
2012년 세 번째 주일입니다. 1월의 한중간에 서 있는 날입니다. 오늘 말씀은 작년에 새벽 설교 하면서 제 자신이 너무 은혜를 받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과 주일날 꼭 나누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주일날 성도님들과 다시 나누기 위하여 묵상을 하는데 하나님이 새로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같은 말씀을 묵상하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정말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죄수 된 바울을 태운 배가 지중해를 향해하여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내용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인생의 풍랑을 극복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이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로마로 항해하던 사람들이 왜 풍랑을 만났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내용보다 외형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석은 은혜롭지만 본문을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항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용보다 외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바울은 풍세를 통하여 상황을 바르게 파악합니다(10절). 바울은 지금 항해하기가 적합하지 않는 계절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5절을 보면은 세 차례 파선 경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타당한 이유를 통해서 그는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난 후에 다시 항해를 하기로 권고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이지만 누구보다도 항해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실력을 가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있습니다(11절). 죄수보다는 선장과 선주라는 외적인 직책이 백부장에게는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명함이 꼭 실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는 바르게 판단할 분별력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두 번째로 바른 판단보다는 다수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뵈닉스로 이동을 합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바른 판다보다는 배안에 있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간 것입니다. 우리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수의 의견이라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을 알고도 다수의 의견에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교회는 다수의 의견에 항상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처음에 일이 잘 풀린다고 결과를 확신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을 때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13절).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다고 처음에는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라굴로라는 광풍” 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에 일이 잘 풀린다고 하나님의 뜻인 냥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으나 마지막에는 무너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처음에는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인생을 살면서 “잘되느냐?, 잘못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수의 의견보다는 진리를, 어떤 환경보다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있을 때?
오늘 말씀은 풍랑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풍랑이 심해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답변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위기 속에서는 세상 것들을 버리고 비워야만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다”고 합니다(18절). 이 배는 무역선이었기 때문에 짐들을 놓지 않으려고 무수히 애쓰고 수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이 더 심해지자 이익과 만족을 가져다 줄 짐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또한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고 합니다(19절). 배의 기구마저 내어버렸다는 것은 배의 조종을 포기한 것입니다.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모든 이익과 만족을 버리고 배를 조종하는 것 까지 내려놓았다면 주님이 구원해 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는 것입니다(20절). 선원들은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렸지만 풍랑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비우고 버려라”는 것은 기독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더 열심히 말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도 그들이 버리고 비웠기 때문에 구원해 준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비우고 버리는 것이 자기만족은 될지 몰라도 주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인생의 풍랑을 해결하는 방법?
이제 우리는 새롭게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마지못해서 비우고 버렸다고 해서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풍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죄수로 잡혀가는 바울이 죄수가 아닌 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21절). 선원들이 풍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버리고 비웠지만 죄에 대한 회개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였을 때 그들이 구원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회개했는지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까지 입었다고 합니다(요3:7,8). 풍랑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은 비우고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선원들이 비우고 버린 것을 엄밀하게 말하면 너무 상황이 어려워서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내려놓았다고 말하면서 회개가 생략되었다면 그것은 포기한 것을 합리화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며 내려놓을 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풍랑 속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명에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켜주신다고 하였지만 배를 지켜 주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22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배를 지키려다 생명을 잃어버리는 영혼들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배안에 물건들을 지켜달라며 매달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우리가 지키고 싶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원들이 생명을 지키고자 배 안에 모든 물건들을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이 보장받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그 하나만으로도 주님을 최고로 높이며 감사할 수 있을 때 그분을 가장 깊이 만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붙잡을 때 풍랑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선원들이 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입니다. 요나가 풍랑의 바다 속에서 다시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이 한국 교회 대단한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절대로 간과 되어서는 안 될 사실이 바로 사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명을 따라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입니다. 사명 따라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힘들어서 좀 더 편해지고자 할 때 더 큰 풍랑에 휩쓸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주님 안에서 붙잡고 있는 사명이 세상의 풍랑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나를 붙잡고 있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서 진심으로 주님 앞에서 회개할 때, 세상의 어떤 것보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주님을 높일 때, 어렵고 힘들지라도 사명을 붙잡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풍랑 밖에서 아니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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