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빌기를 다하매”
설교 본문 : 사도행전 4장 23-31절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0. 들어가는 글
걷는 속도와 쥐는 힘이 약하면 치매와 뇌졸중의 걸릴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강추위 속에서도 건강관리 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항상 세상과 충돌하며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향한 세상의 핍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리라 여겨집니다. 세상에서 어떤 단체가 선한 일을 하면 뉴스의 조명을 크게 받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기독교만은 선한 일 조차 핍박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도덕적인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리의 문제가 담겨져 있음을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진리와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진리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독교의 진리와 세상의 진리가 같다면 굳이 충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과 전혀 충돌 없이 살아간다면 진정 기독교의 진리를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초대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쳐 주는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행3장). 그러나 칭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더 가중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진짜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과 충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라고 합니다(26절). 왜 기독교의 진리가 세상과 충돌 할 수밖에 없습니까? 세상은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며 살아가면 선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롬3:23)”고 합니다. 세상과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름대로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라고 분노하며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요14:6). 사도행전에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 합니다(행4:12절).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면 세상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우리가 진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하든지 회개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분노도 없고 회개도 없다면 두루뭉술한 가짜 복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짜 복음은 들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든지 아니면 자기 죄를 깨닫고 고꾸라지게 돼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이 두 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진짜 복음을 증거 할 때는 “어찌할꼬” 라는 마음의 탄식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삼천명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2장). 그러나 스데반이 진짜 복음을 증거할 때는 “어찌할꼬” 라는 마음의 탄식이 분노로 이어져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순교를 하였습니다(행8장).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어떤 반응을 하였습니까?
시골 동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시골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면서 얼마나 재미있게 놀면서 함께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 자주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복음을 제시하면 자신들을 “왜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느냐?”고 발끈했습니다. 그때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왜 나는 가정에서도 분쟁을 일으키고, 친구들과도 분쟁을 일으킬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너는 예수를 믿어도 참 요란하게 믿는다” 는 핀잔에 마음이 많이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가정에서나 친구들과 분쟁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적당히 입을 다물고 살아야지” 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가슴 아프게 찌르는 것은 불신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살다가 지옥가라고 내버려두는 가장 무책임한 행동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가짜로 유지되는 평화보다는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분쟁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신앙 양심을 가졌다면 영생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해야 합니다(29절).
2. 핍박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초대 교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들의 반응을 보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라고 합니다(29절).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도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입니다. 관원들이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말고, 그의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심한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이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환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들과 신앙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과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 목적은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복음을 전파할 때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합니다(고전1:27). 하나님이 왜 약한 자를 사용하십니까? 약한 자는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딴소리 안하고 복음만 증거합니다. 자신이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의 지식대로 전하다가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지난 주 저의 가슴에 깊이 다가온 어느 영화의 한편 대사입니다. 그 대사는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 뒤에 숨고, 칼잽이는 칼 뒤에 숨는다” 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저에게 적용시켜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제가 말씀 뒤에 숨는 사람이냐?” 라는 것입니다. “말씀 뒤에 숨지 못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점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 뒤에 숨어야 합니다. 예수님 뒤에 숨지 못하고 자신을 앞으로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에 숨을 때 그분이 증거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빌기를 다하매” 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도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합니다(31절). 사도들은 대충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하게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끝장을 보고자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 충만이 임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 빌기를 다할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어중간한 기도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10가지 유형이 있답니다. 바쁘다형은 할 일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입니다. 망설임형은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포기형은 한두 번 기도해보다가 그만 두는 사람입니다. 천하태평형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고 하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넋두리형은 자신의 신세타령만 하다가 기도를 끝내는 사람입니다. 과시형은 대중기도는 유창하게 잘 하지만 실제로는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핑계형은 이 핑계 저 핑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심형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믿지 못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게으름형은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게을러서 기도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무지형은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몰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더 할수록 성경 지식도 많아지고 헌금도 더 많이 합니다. 봉사도 더 열심히 하며 성도들과 교제도 더 많이 나눕니다. 모든 것이 늘어났는데도 기도가 줄어든다면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파도 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주님과 깊이 만나는 영적인 삶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빌기를 다하는 그런 끝장을 보는 기도한번 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빌기를 다하면 우리의 모인 곳이 진동하고 성령이 충만해지는 동일한 역사가 나타남을 믿고 실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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